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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당했다. 그동안 야당이 법안 연계 수단으로 활용해오던 국회선진화법이 이번에는 야당을 향했다.
국회가 3일 새벽 본회의를 열어 올해 예산보다 11조 원 늘어난 386조 원 규모의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예산안과 함께 관광진흥법, 국제의료사업지원법, 모자보건법, 대리점거래공정화법(남양유업방지법), 전공의특별법 등 여야 원내대표가 처리하기로 합의한 5대 쟁점 법안도 본회의를 통과했다.
문제는 예산안과 5대 쟁점 법안이 합의처리에 이르게 된 과정이다. 지난 2012년 통과된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여야가 예산안 합의를 11월 30일까지 마치지 못할 경우 정부원안이 12월 2일 본회의에 자동 부의된다. 새누리당은 이 ‘예산안 자동부의’ 조항을 적극 활용했다.
새누리당은 정부여당이 요구하는 법안들을 처리해주지 않을 경우 내년 예산안을 정부 원안대로 처리하겠다고 야당을 압박했다.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을 하루 앞둔 1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긴급 당정회의를 열고 “시급한 민생 관련 법안과 노동관련 5대 법안을 예산과 연계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여야는 1일 밤 3+3(원내대표, 원내수석부대표, 정책위의장) 회동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여야는 2일 본회의에서 5대 쟁점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남양유업법 등 야당이 요구하는 법안을 끼워 넣을 수 있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계속 강조하던 경제활성화 3개 법안 중 국제의료사업지원법, 관광진흥법을 처리하기로 합의해야만 했다. 나아가 새누리당이 요구하던 테러방지법, 북한인권법을 정기국회 내 합의처리하기로 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예산안을 정부원안 그대로 처리하겠다는 새누리당의 압박에 그동안 반대해 오던 법안의 처리에 합의해버린 것이다. 당내 혼란도 겪어야했다. 이상민 법사위원장은 2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5대 쟁점 법안은 여전히 각 상임위원회에서 법안 심사 중에 있다. 아직 법사위에 회부도 안 됐고 알지도 못하는 법“이라며 법사위에 상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5대 쟁점 법안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본회의에 올려 처리됐다.
테러방지법 합의처리는 정보위 소속 의원들과도 조율이 되지 않았다. 국회 정보위 소속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국정원의 권한을 강화하면 안된다고 천명했고 원내대표도 잘 알고 있는데 의견조율이 안됐다”며 “의총을 하던지 해야 한다. 당황이고 뭐고 (합의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새정치연합 몇몇 의원들은 2일 의원총회에서 이종걸 원내대표의 합의처리를 강하게 성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원총회는 4시간 가까이 이어졌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고 문재인 대표가 최고위원회를 열어 의견 조율에 나섰다. 합의문 문구 중 ‘합의처리’를 ‘합의한 후 처리’로 수정하고 ‘향후 상임위와 충분히 협의’가 법안 통과의 전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등의 의견 조율이 있은 후 논란은 일단락됐다.
예산안과 쟁점 법안을 연계 처리하겠다는 새누리당이 판정승을 거둔 셈이다.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일 기자들과 만나 “이 정도면 경제활성화 법안이 다 잘됐다. 속이 후련하다”라고 말을 정도였다. 반면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의 압박에 당해 그동안 자신들이 ‘재벌민원법’이라 부르던 법안들을 통과시켜주고 당내 반발까지 겪는 등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간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을 비난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상황은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국회선진화법은 쟁점 법안의 경우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동의해야 본회의 상정을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따라서 여당이 특정 법안을 밀어붙이려고 하면 야당이 다른 법안을 연계해 버티는 등 법안 거래가 가능했다.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이 다수결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까지 제기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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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연합이 예산안 원안처리하겠다는 압박에 당한 이유는 ‘지역구 챙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간 야당은 정부의 예산안을 ‘TK 챙기기’ ‘총선용 예산안’이라고 비판해왔다. 정부예산안을 어떻게든 삭감하고 지역구 예산을 집어넣어야하는 것이 지역에서 재선해야 하는 야당 의원들의 필수임무다. 더욱이 총선을 앞두고 야당 의원들이 의정 성과를 홍보하려면 이런 예산 끌어오기가 필수적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3일 상무위원회에서 “선거를 목전에 둔 국회의원들은 꼼꼼한 예산심의는 뒷전으로 한 채, 지역구 예산 따기에 혈안이 되었다. 지역 SOC 예산은 무려 4000억이나 증액됐고 증액분은 양당이 기반하는 지역에 몰렸다”며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을 악용해서 예산안과 법안을 연계하는 횡포를 부리며 압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이 을이 되어 끌려 다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지역구 예산 몇 푼에 민생법안을 맞바꾸는 제1야당의 무책임과 무기력함에 화가 난다”고 비판했다.
정의화 국회의장도 3일 새벽 본회의에서 예산안을 의결한 이후 “지금 국회는 국회의원과 상임위는 보이지 않고, 여야 정당 지도부만 보이는 형국이다. 교섭단체 지도부에 의한 주고받기 식의 ‘거래형 정치’는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며 “진정한 사회적 대타협이라기보다는 이익 챙기기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결위원회 간사인 안민석 새정치연합 의원은 의원총회에서 “카카오톡 등으로 지역예산 반영해달라면서 법안 연계하면 안 된다고 하신 분들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호남 지역 의원들은 SOC 예산 6170억 원 가운데 1100억 원만 반영된 것에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새정치연합 의원들이 쟁점법안보다 지역구 예산 끌어오기에 주력했다는 짐작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간 자신들이 무기로 사용해오던 국회선진화법이 거꾸로 야당을 옥죄어 오자 새정치연합에서도 국회선진화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예산안에 반대 표결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3일 본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나 “법안처리를 연계시켜서 법안을 강행처리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관행이고 국회선진화법에 그렇게 악용될 소지가 내포돼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식의 ‘바꿔먹기 정치’가 앞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쟁점법안들이 연말이 되면 예산처리와 맞물려 국회 상임위 논의도 거치지 않은 채 원내지도부의 원샷 협상으로 처리될 수 있다. 의원들은 지역구 예산을 끌어와 속으로는 웃으면서 겉으로는 협상한 원내지도부를 탓하고 지도부는 국회선진화법 탓이나 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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