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 건드린 대통령, ‘박근혜 관심법’ 연내처리 좌절?
테러방지법 등 쟁점법안 정기국회 내 처리 불투명…“국회는 청와대 출장소 아니다”
박 대통령이 강조했던 테러방지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의 정기국회 내 통과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야는 올해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9일 본회의에서 비쟁점 법안만을 통과킬 것으로 보인다. 야당을 직접 겨냥한 박 대통령의 발언이 도리어 역효과를 냈다는 분석이다.
여야는 지난 2일 3+3(원내대표, 원내수석부대표, 정책위의장) 협상 끝에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던 ‘박근혜 관심법’ 중 관광진흥법, 국제의료사업지원법 등을 통과시켰다. 여야는 정기국회 내(12월 9일) 테러방지법, 북한인권법 등의 쟁점법안을 처리하기로 했으나 이견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당초 9일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원샷법(기업활력제고특별법) 등이 통과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정부여당이 끈질기게 야당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테러방지법의 경우 테러대응센터를 국정원이 아닌 총리실로 두는 방안, 국회에 정보감독지원관 등을 설치하는 방안 등 이견이 좁혀지는 듯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압박이 결과적으로 역효과를 사게 됐다. 박 대통령은 8일 국무회의에서 “집권하던 시절에 적극 추진하던 정책을 이제 와서 반대한다면 과연 누가 그 뜻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라며 참여정부가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대책을 내놓았다는 점을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도 신년 연설에서 일자리를 위해서는 의료서비스 분야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며 노 전 대통령까지 언급했다.
▲ 지난 8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 ||
박 대통령은 테러방지법도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기본적인 법 체계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전 세계가 안다. IS도 알아버렸다”며 “이런 데도 천하태평으로 법을 통과시키지 않고 있을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또한 “앞으로 상상하기 힘든 테러로 우리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됐을 때 그 책임이 국회에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국민이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야당 책임론을 제기했다.
앞서 박 대통령은 7일 청와대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를 만나 ‘박근혜 관심법’의 연내 국회처리를 요구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살리기에도 골든타임이 있는데 놓쳐버리면 기를 쓰고 용을 써도 소용이 없는 것”이라며 “내년에 국민을 대하면서 선거를 치러야하는데 정말 얼굴을 들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강조한 법안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기업활력제고법(원샷법), 노동5법, 테러방지법 등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회동 자리에서 “테러가 날이 갈수록 잔인해지고 있는데 지난 14년 동안 이 법이 통과가 안됐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기본적인 테러방지법조차 없다는 게 전 세계에 알려졌다. 대한민국이 테러를 감행하기 만만한 나라가 됐다”고 밝혔다.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과 회동 뒤 “테러가 나면 새정치민주연합이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이런 상태에서 만약 사고가 나면 누구 책임인가. 야당 책임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라고 야당을 압박했다.
야당은 이러한 압박에 반발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무시와 여당 통제, 그리고 야당 협박이 도를 넘고 있다. 악법을 대통령의 호통 때문에 통과시킬 수 없는 일”이라며 “국회는 청와대 출장소가 아니다. 악법을 반드시 저지하겠다는 결의를 더욱 굳게 한다”고 말했다.
이종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 역시 9일 의원총회에서 “국정 운영의 실패를 야당에게 전가하며,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 입법권을 부정하고 있는 대통령의 발언에 강한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며 “특히 자신의 ‘지시’를 국회가 따르지 않을 경우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협박’은 결단코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의 발언이라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새정치연합은 이미 ‘박근혜 관심법’을 통과시켜줬다. 지난 1일 3+3 회동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경제활성화 3법’ 중 국제의료사업지원법, 관광진흥법을 2일 본회의에서 처리하는데 동의해줬고 실제 2일 본회의에서 두 가지 법안이 통과했다.
이날 합의는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이 정도면 경제활성화 법안이 다 잘 됐다. 속이 후련하다”고 말할 정도로 새누리당의 판정승이었다. 새정치연합은 모자보건법, 남양유업법 등 야당이 강조한 법안도 같이 통과시켰으니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했으나 예산안과 쟁점법안을 연계 처리하겠다는 새누리당의 엄포에 총선용 지역구 예산이 필요했던 새정치연합이 동조해줬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로 인해 야당 지지층의 강한 반발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엄포’로 테러방지법이나 서비스산업기본발전법, 원샷법까지 통과시켜줄 경우 박 대통령에게 끌려 다닌다는 비판이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해당 법안들은 상임위 논의도 거치지 않았다.
이 런 이유로 새누리당 지도부는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9일 원샷법, 테러방지법 등에 대한 직권상정을 요구했으나 정 의장은 “국회법에 따라서 해야지 마음대로 못한다”고 거부했다. 정의화 의장은 지난 3일 새벽 본회의에서 쟁점 법안들을 직권상정으로 처리한 후 “지금 국회는 국회의원과 상임위는 보이지 않고, 여야 정당 지도부만 보이는 형국이다. 교섭단체 지도부에 의한 주고받기 식의 ‘거래형 정치’는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내부 분란도 큰 부담을 지웠다는 분석이다. 문재인 대표가 안철수 의원의 전당대회 개최 요구를 거부하면서 안 의원을 비롯한 비주류계 의원들의 탈당설까지 나오고 있다. 문 대표 입장에서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압박에 의해 법안을 통과시켜줬다는 비판까지 제기될 경우 리더십에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새누리당은 당장 10일부터 임시국회를 열어 정기국회 내 처리하지 못한 쟁점법안들과 노동 5대 법안들을 처리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새정치연합이 임시국회 개최 자체에 조건을 걸어 논의가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종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9일 의원총회에서 “대통령의 엄포에 새누리당은 일방적으로 임기국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하명’한 법률안들을 날치기 처리하기 위한 임시국회는 정국 파행만을 예고할 뿐”이라며 “세월호특조위 기간연장이나 국회 상임위에서 청문회를 할 수 있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회법 문제 수용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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