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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문학 외

밀정, ‘너에게 독립운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밀정, ‘너에게 독립운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리뷰] 암살과는 달랐던 밀정의 결말…흔들림과 망설임 속에 도달한 독립운동이라는 목적지


(영화 ‘밀정’과 ‘암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흥행하지 못한다” 이 법칙은 한동안 한국영화의 징크스였다. 이 징크스는 지난해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최동훈 감독)로 인해 깨졌다. 이후 ‘귀향’, ‘동주’, ‘덕혜옹주’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이어졌다. 내편인지 네 편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파이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밀정’도 일제강점기의 경성이 배경이다.  

‘암살’의 메시지는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역)의 말에 압축돼 있다. 따라서 ‘암살’은 안옥윤이 해방 이후 친일파이자 독립군의 밀정이었던 염석진(이정재 역)을 처단하는 것으로 끝난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친일파 처단을 영화를 통해 이루는 일종의 판타지다.

▲ 영화 ‘암살’ 스틸컷

‘암살’에서 독립운동이라는 대의는 각기 서로 다른 배경과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황덕삼(최덕문 역)은 임무를 수행하다 사망하고, 목숨을 잃을 뻔한 속사포(조진웅 역)는 다시 총을 들고 현장에 나타나 친일파를 향해 총을 쏜다. 대장 안윤옥은 끝내 친일파 강인국을 암살하고, 밀정 염석진마저 처단하는데 성공한다. 영화 암살 속의 독립군은 하나같이 포기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한다.

반면 ‘밀정’의 메시지는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 역)이 주인공 이정출(송강호 역)에게 건넨 말에 담겨 있다.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이고 우리는 그 실패를 디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정출은 젊었을 적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지만 이후 일본경찰로 길을 바꾼다. 경부 자리까지 올라가며 출세가도를 걷는다. 민족반역자, 친일파라 불릴 만하다.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넌 독립이 될 것 같나?’라고 묻는 회의주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정출은 일본 경찰의 명령으로 의열단의 밀정이 되기까지, 그리고 의열단원들을 돕는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관련기사 : 친일파? 독립운동가? 송강호는 어느 쪽 밀정이었을까

이정출은 의열단원들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채 기차에 탑승한 의열단원들에게 위험을 알린다. 하지만 늘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러면서도 의열단과 자신을 위협하던 일본경찰 하시모토를 쏴버린다. 잡혀온 의열단원 연계순(한지민 역)을 고문하라는 명령에 망설이지만 결국 고문을 집행한다. 의열단원 김장옥(박휘순 역)을 생포하려는 첫 장면부터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정출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 영화 ‘밀정’의 주인공 이정출(송강호 역).

그가 흔들리는 이유는 ‘밀정’ 속 등장인물들에게 독립운동이란 주어진 대의가 아니라 ‘질문’이기 때문이다. ‘밀정’의 등장인물들은 내내 ‘너에게 독립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시달린다. 누군가에게 독립운동은 대의지만, 누군가에게는 대의가 아니다. 영화 속 의열단이 누가 밀정인지 누가 밀정이 아닌지 가려내기 위해 수많은 감정과 시간을 소모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밀정’ 속 의열단원들은 한없이 나약하다. 독립운동이란 대의로 똘똘 뭉친 것 같았던 김우진(공유 역)도 잡혀가는 연계순의 모습 앞에서 이성을 잃는다. 영화의 홍일점이라 할 수 있는 연계순은 ‘암살’의 주인공 안윤옥과 같은 강인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당하고, 괴로워하다 사망한다.

이정출의 선택도 언뜻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가 왜 의열단원이라는 고생길을 택한 것일까. 하지만 영화 속 그의 선택은 어느 순간 내려진 결단이 아니라 수많은 흔들림과 망설임 속에서 어느 새 도달해버린 목적지에 가깝다. 친구 김장옥의 죽음을 보며 느낀 복잡한 감정들 사이에서, 정채산을 잡겠다는 일념과 정채산이 보여준 신뢰 사이에서, 자신의 출세를 가로막는 하시모토의 등장과 자신에게 손을 내민 의열단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는 어느새 폭탄을 들고 김우진이 다하지 못한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밀정’은 이정출이 어느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에서 독립군이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정출의 흔들리는 눈빛과 대사를 통해 그 선택의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이정출은 정채산이 말한 ‘앞으로 나아가는 실패’를 상징한다. 독립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큰 대의를 품지도 못했지만 어느새 독립운동으로 나아간 이정출. 이 영화는 대한민국의 독립은 어쩌면 수없이 흔들렸던 독립운동가들의 수없이 많은 실패를 딛고 탄생했을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 영화 ‘밀정’ 스틸컷.
‘밀정’은 암살이 보여준 통쾌한 복수극 대신 의열단원이 된 한 밀정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낸다. 그 시점에서 이정출도 정채산도 그 누구도 자신들의 행동이 그냥 실패로 끝날지 ‘앞으로 나아가는 실패’였을지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실패가 있었기에 더 나아갈 수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