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왜 천천히 읽어?” 못 배운 게 한이 된 87명의 시인들
[서평] 보고시픈 당신에게 / 강광자 외 86명 지음 / 한빛비즈 펴냄
대학진학율이 80%에 달하는 시대, 갓난 아이에게 한글은 물론 영어까지 가르치는 나라다. 이 런 시대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이들에게 ‘글자를 모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글을 몰라서 발생하는 불편함은 겪어보지 못한 ‘보릿고개’ 같은 존재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2014년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성인 100명 중 6명은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를 하지 못한다. 이런 비문해자들은 264만 명에 달하고 60~70대 여성 성인 10명 중 5~6명이 문해교육을 필요로 한다. 글을 배우지 못한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여러 사정으로 공부의 때를 놓쳤고, 나이 들어서는 자식 뒷바라지하다보니 60~70세를 훌쩍 넘겼다.
신간 ‘보고시픈 당신에게’는 각양각색의 이유로 한글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 어르신들이 쓴 시와 산문 89편을 엮은 책이다. 저자는 늦깎이 한글학교 학생 87명이다. 고령이라 책이 출간되는 동안 세상을 떠난 저자도 있다.
인문학자 김경집은 “글자를 읽어내지 못한다는 건 삶의 커다란 귀퉁이를 하나 허물고 사는 것과 같다”고 했다. 비문해자들은 한글을 읽고 쓰는 게 익숙한 일반인들이 상상하지도 경험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간단한 메모나 은행 업무는 물론 아이들 공부 한 번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안타까움과 설움, 글을 몰라 깜깜했던 평생의 이야기가 시와 산문에 담겼다.
▲ 보고시픈 당신에게 / 강광자 외 86명 지음 / 한빛비즈 펴냄 |
“나는 회사에서 한글을 몰랐을 때 누가 전화가 와서 사장님이 박옥남씨 이거 메모 좀 해줘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하면서 너무 힘들었다”
“아이 낳고 출생신고를 하러 간 날 나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손도 떨리고 얼굴은 빨개지고 말도 못했다”
“아이들 어릴 적 성적표를 받아와도 볼 줄도 어디에 도장을 찍을 줄도 몰라 남편 도장을 성적표와 함께 들려 보냈다. 만약 그 때가 지금이었다면 잘했다 머리 쓰다듬어주고 도장도 진하게 찍어 보냈을텐데. 이젠 나도 내 이름이 박힌 도장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이 은행에 가서 십억 보증서를 써달라 해서 은행에 갔는데, 이름을 못 써서 은행 직원이 내 손을 잡고 글을 썼다. 그 때는 너무 당황해서 땀을 팥죽 같이 흘렸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야 눈에 뭐가 들어가서 글씨가 안 보여. 노래 좀 찾아달라고 했다. 지금은 공부를 하고 나니 자신이 있어 두렵지가 않다”
“할머니 책 읽어줘. 세 살 먹은 손녀딸이 나에게 책을 읽어달랜다. 가슴이 벌컥 내려앉는다. 더듬더듬, 글자는 왜 이리 구불구불. 할머니는 왜 천천히 읽어? 할머니는 할 말이 없다”
글은 자신의 삶과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다. 늦깍이 학생들이 먼저 떠난 배우자와 자식, 며느리에게 전하지 못한 메모는 뒤늦게 시와 산문이 됐다.
“여보, 미안해요. 내가 빨리 글을 알았더라면 당신 이해하고 좋은 안내,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었을 것을”
“우리 아저씨가 조금만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 가셨다. 살았으면 내가 편지라도 했잖아”
“달력도 못 보는 시어머니, 한글도 모르는 며느리. 미워서 원망했던 시어머니도 답답하고 깜깜한 세월 참 힘들었겠구나 싶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 적어 편지 한 장 보내고 싶다.”
비문해자들에게 문해 교육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쓴다는 것의 의미를 넘어선다. 시를 쓰고 산문을 쓸 수 있게 된 비문해자들은 모임을 만들고 사회에 참여한다. 문해교육은 세상을 연결해주는 창이자, ‘나를 위해’ 살 수 있게 만드는 첫 번째 작업이다.
“6연 전부터 몸이 아파요. 백병원에서 파키스병이라 함이다. 땀이 비오더시 헐러내림니다. 옷 두 벌 새 벌식 배림니다. 온 몸이 떨림니다. 그래서 글이 삐뚤삐둘함니다. 부끄럽지 안아요. 잘몬한 기 업서요.”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헤어져 우물쭈물하지 말고. 그랬다. 내 무식이 알려질까봐 속으로 벌벌 떨었다. 요즘은 세상이 환하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겁이 안 난다.”
“어렸을 때 나는 학교를 다니지 못해 그 흔한 동창생이 없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허전하다. 오십이 훌쩍 넘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남들에게는 흔한 동창생, 나에게는 특별한 동창생 내일은 옆집 언니한테 가서 말해야지. 언니 나도 동창 모임에 가요!”
모두가 ‘디지털 3.0’을 이야기하며 모든 업무를 인터넷으로 처리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참 편해 보이는 디지털 시대, 이 수많은 비문해자들은 어디 가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업무를 처리해야할까? 국가 지원이 필요한 문해교육 기관 중 실제 지원을 받는 곳은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예산이 부족해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되는 곳이 다반사다. 문해교육이란 평생 남을 위해 사느라 글을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국가가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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