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글 /단상

진보정치의 영원한 레퍼런스, 노회찬을 추모하며

나에게 노회찬은 청년이다. 정의당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청년정치학교 강연의 한 꼭지를 노회찬 대표가 맡았고, 나는 당시 당의 청년조직 담당자였다. 강연에 온 노 대표에게 약간 쭈뼛쭈뼛하며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조윤호입니다. 당 청년담당하고 있습니다.” 노 대표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오, 그래요. 저도 유엔 기준으로는 아직 청년입니다.” 살짝 긴장하고 있던 나는 긴장이 풀리며 웃었다.

3~4초 밖에 되지 않을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늘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대를 고려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정치인이었다.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노회찬을 사랑한 이유였다.

6411번 버스와 다수의 삶을 바꾸는 진보정치

노회찬 대표가 서거한 후 2012년 진보정의당 출범 당시 노 대표의 당 대표 수락 연설이 다시 화제가 됐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연설이다. 새벽 4시에 출발하여 15분 만에 만석이 되는, 6411번 버스를 꽉 채우는 청소 미화원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중략)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들은 아홉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 노회찬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노회찬 대표가 말한 투명인간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소수자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다수다. 6411번 버스를 타고 새벽에 출근하는 청소노동자들의 처지는 하루 종일 일해도 월200만원조차 손에 못 쥐는 편의점 사장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3교대 근무를 하는 병원 간호사의 처지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 은행원의 처지도 똑같다.

성별, 나이, 지역, 인종 등에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보다 강한 사람의 눈치를 보며, 고단한 노동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멈추면 대한민국은 움직이지 않는다. 온 거리가 3일만 지나도 쓰레기로 넘쳐날 것이고, 밤에도 번쩍이던 거리는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질 것이다.

노회찬이 말한 진보정치는 바로 이들의 삶을 바꾸는 것이었다. 세상을 움직이고 있지만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한 채 고단하게 살아가는 국민 다수에게 노동의 제값을 돌려주는 것. 노회찬이 말한 진보정치의 역할이다.

그래서 노회찬은 늘 가능한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방법을 찾았다. 약자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 하나가 되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할 때까지 계속 설명했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전에 배경부터 설명했다.

심상정 후보가 대선tv토론에서 문재인 후보를 공격했다고 지지자들이 화가 났을 때, “후보 토론이니 당연한 거다” “그게 민주주의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처음 해보는 방식의 토론이어서, 여러 명과 차례로 토론하려 했는데 문재인 후보와 토론하고 시간이 끝나버렸다”고 배경과 상황을 설명했다. 화가 났던 많은 지지자들이 노회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2월 노회찬 대표가 국회 비교섭단체 연설 때 미국의 투표용지를 들고 나타났다. 스물여섯 번 투표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유권자와 일곱 번 투표하는 한국 유권자. 그만큼의 차이가 미국 국민과 한국 국민이 지닌 권력의 차이라고 말했다. 투표를 더 많이 하는 것이 국민에게 이로운 이유를 설명했다. 복잡한 선거제도에 대해서는 “야구규칙보다 쉬우니 제가 설명 드리겠다”고 했다.

노회찬이라는 레퍼런스

꽤 최근까지만 해도 나는 진보정당이 한국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진보정당 하나 있어야지. 안 그러면 누가 저런 이야기를 하겠어.” 그런데 이제는 그런 생각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 민주노동당을 경험하지 않은 2030 세대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이 아니라 진보정당 할아버지라도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끝이다. 레드 콤플렉스와 기울어진 운동장 탓하던 시절도 시민들이 박근혜를 끌어내린 이후 끝났다.

노회찬은 진보정치가 왜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말해줬던 사람이다. 그래서 노회찬은 영원한 레퍼런스다. 복지, 무상급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최저임금....나는 찬성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무관심한 이슈가 있으면 꼭 노회찬이 어떤 말을 했는지부터 찾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노회찬이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노회찬이라면 어떻게 사람들을 설득했을까. 노회찬이라면 잔뜩 긴장한 채 반대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긴장을 어떻게 풀어주었을까.

요즘따라 노회찬 대표가 더 보고 싶다. 제1야당이 부활을 꿈꾸며 아무말대잔치를 펼치는 지금, 촛불이 요구한 사회경제적 개혁이 진도를 못 빼고 있는 지금, 노회찬은 지금 상황을 뭐라고 설명했을까.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했던 노회찬이라면 한국과 일본이 싸우고 있는 지금 상황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았을까. 노회찬의 한 마디가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