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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단상

힙통령 장문복에게 배우는 진보정치의 길

며칠 전이 노회찬 대표 서거 1주기이다 보니 노회찬이 꿈꾼 진보정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노회찬이 훌륭한 진보정치인이었던 이유에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주요한 요인은 대중의 평가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난 진보정치가 대중화되는 데 있어서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힙통령 장문복에게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2010년 8월 6일 방영된 <슈퍼스타K2> 대구 오디션. 예선에서 탈락한 한 참가자가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는데, 그가 바로 ‘힙통령’이라 불리는 장문복이었다.

당시 16세의 중학생 장문복은 “한국 힙합, 제가 생각할 때는 좀 어중간한 것 같아요. 길을 못 찾고 있는 거 같아요. 대중성으로나 아니면 음악성으로나 (길을) 못 찾는 거 같아요”라며 ‘힙합 절대고수’의 풍모를 비치며 등장한다. 하지만 이내 10초도 지나지 않아 시청자의 눈빛은 ‘충격과 공포’로 변한다.

장문복은 오디션에서 속사포 랩으로 유명한 래퍼 아웃사이더의 ‘스피드 레이서’란 노래를 불렀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실력이었다. 부자연스러운 발성에 박자까지 맞추지 못하면서 장문복의 랩은 흡사 외계어처럼 들렸다. 어안이 벙벙하던 심사위원들은 결국 빵 터지고 말았다. 장문복은 심사위원들에게 “방언 같기도 한데 어디 언어냐” “가사는 없는 거고?”라는 조롱을 당한다.

이후 장문복은 ‘힙통령’(힙합+대통령)이라는 조롱 섞인 별칭을 얻으며 인터넷 세계에서 ‘합성 필수요소’로 등극했다. 수많은 패러디물이 양성되면서 힙통령 장문복의 <슈퍼스타k> 참가영상은 유투브의 레전드 영상으로 남았다. 인터넷에서 자신이 힙통령이라고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날 정도였다.

그런데 두 달 뒤인 2010년 10월 10일 놀랍게도 장문복이 다시 시청자들 앞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슈퍼스타k2>의 주최 측인 엠넷이 ‘TOP3’ 무대를 꾸미며 일종의 특별무대를 구성했는데, 특별무대의 주인공이 장문복이었던 것이다. 그는 두 달 전에 오디션에서 불렀던 노래 ‘스피드레이서’를 부르며 나타났다. 심지어 원곡의 주인공인 아웃사이더와 함께였다. 발음이 좋지 않은 점은 여전했으나 두 달 간 열심히 연습했는지 예선 탈락했을 때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수많은 조롱을 받아 트라우마가 생길 법 한데도 포기하지 않고 연습해 4500명의 관객 앞에서 ‘스피드레이서’를 다시 불렀다는 점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했다. 이 공연 이후 장문복에 대한 평가가 많이 바뀌었다. “멘탈갑” “진정한 대인배”라며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문복은 2016년에 자신의 별명을 딴 노래 ‘힙통령’을 발표한다. 자신의 트라우마 같던 힙통령이라는 별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뤘다. 2010년의 자신이 겪은 상황,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곡이다.

노래가 발표되자 응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비웃음거리가 되고도 포기 안 한 게 대단하다” “대부분의 대중이 자길 외면했는데도 당당하게 다시 헤쳐 나왔다. 진짜 아무나 이럴 수없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듯”과 같은 반응이 쏟아졌다.

장문복이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2017년 ‘프로듀스 101 시즌2’를 통해서였다. 2017년 3월 9일 ‘프로듀스 101’ 측에서 공개한 영상에 나타난 것이다.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7년 전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거의 전 국민 앞에서 공개적 망신을 당했던 장문복이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장문복은 대중의 평가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힙통령은 탄핵되지 않는다” 장문복의 귀환을 알리는 기사제목이었다. 그의 모습이 공개된 2017년 3월 9일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선고(3월 10일) 하루 전날이었기 때문에 등장한 제목이었다. 탄핵 뉴스가 쏟아지던 시기였음에도 포털 사이트는 장문복 이름으로 도배가 됐다.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을 패러디한 ‘어센장’(어차피 센터는 장문복)이라는 말도 나왔다.

장문복은 우승도 센터도 하지 못했다. 101명의 참가자 중 최종성적은 27등이었고, 순위에 들지 못해 아이돌로 데뷔하는 기회도 얻지 못했다. 다른 후보들에 비해 실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많았다. 하지만 장문복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다시 도전해서 힙통령의 이미지를 씻어내고 장문복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탈락소감을 통해 “대중에게 저를 드러내기가 좀 많이 무섭고 두려웠는데, 그걸 극복하게 해준게 <프로듀스 101>”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2019년 5월에 ‘리미트리스’라는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장문복은 자신을 조롱한 누리꾼들과 싸우지 않았다. (요새 그런 일들이 자주 있는데) 그들을 고소한다거나, 세상이 자신을 혐오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을 몰라주는 세상 탓을 하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와서 대중의 평가를 받았다. 1등은 못하고 비판도 많았지만, 그래서 결국 그는 힙통령에서 벗어나 장문복으로 새로 태어났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중들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당은 절대 집권할 수도 없고,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도 없다. 다수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옳은 소리만 하는 건 그냥 외계어 랩일 뿐이다. 장문복은 2016년 발표한 곡 <힙통령>에서 이렇게 말한다. “6년 전에 했던 외계어 랩, 누굴 위한 순간이었는지는 몰라도 잘 봐. 이 시간 오늘도 계속 랩을 하고 있어. 자 들리냐?” 문을 열고 대중의 평가와 당당히 마주하려 할 때 외계어 랩이 사람들의 귀에 들리게 될 것이다. 노회찬의 언어가 그랬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