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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인문, 사회과학

실천으로 오류를 증명했던 혁명가 김산

 


아리랑

저자
님 웨일즈 지음
출판사
동녘 | 2005-08-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12년만에 개정3판으로 재출간되는 『아리랑』. 미국인 여기자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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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서론


우리가 일제에게 강점당했던 36년은 긴 세월이다. 36년 내내 일제에게 강하게 맞서고, 일제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굴복했다. 조선이 일본보다 더 강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우생학과 제국주의 논리로 무장했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일제에 투항했다. 일제와 타협하여, 조선인들의 참정권을 늘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타협적 민족주의자들도 대거 친일파로 돌아섰다. 아직은 혁명의 때가 아니니, 일단 교육과 언론 활동을 통해 조선민족의 실력을 양성한 후, 훗날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애국 계몽론자 중 일부도 결국 일제에 굴복했다.


우리가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친일로 전향했다는 사실을 자각할수록 일제에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던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은 더더욱 빛난다. 그렇다면, 왜 누군가는 일제에 투항하고 누군가는 일제에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던 것일까?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이에 대한 대답을 어느 정도 제공하고 있다.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김산 같은 사람은 왜 일제와 끝까지 싸울 수 있었는지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실천의 혁명가 김산


몇 년 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MBC 다큐멘터리를 열심히 본 적이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1980-90년대 한국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에 대해 다룬 '한국의 진보’ 3부작이었다. 1990년대 초반 소련의 붕괴를 계기로,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버리고 전향했다. 아니, 사회주의를 버린 정도가 아니라 사회운동을 떠나고 기득권에 포섭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고 계속 운동에 참여하고, 심지어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은 활동가들이 몇 몇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는 PD의 물음에 활동가 중 한 명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소련이 망하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 당장 제 옆에는 억압받는 노동자가 있고, 농민이 있는데, 같이 싸워야지.”


즉 그 활동가는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서 사회주의를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붕괴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열심히 책을 읽고 이론을 공부했던 수많은 지식인들은 소련의 붕괴로 인해 자신의 이론과 믿음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노동자의 옆에서, 농민의 옆에서 발로 뛰었던. 그리고 이들을 위한 길은 사회주의 밖에 없다고 사회주의를 ‘실천’했던 활동가들은 소련이 붕괴했건 말건 사회주의와 사회운동을 버릴 수 없었다.


김산의 삶도 마찬가지였기에, 그 역시 끝까지 일제에 저항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는 헤겔을 읽고 무정부주의 이론을 공부하고, 톨스토이에 심취했으며 마르크스를 학습했다. 하지만 그에겐 이론보다 실천이 늘 우선이었다. 그는 변증법을 공부했지만, 변증법의 실천을 더 중요시했다. 그는 혁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변증법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 나갔다.


2. 평화주의자에서 테러리스트로


그는 수많은 실천적 오류들을 겪으면서 공산주의라는 자신만의 대답에 도달했다. 그는 어렸을 적, 기독교를 믿었던 평화주의자에 가까웠다. 그의 학교 선생님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알려주고, 조선이 처한 현실을 세계만방이 알게 된다면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 많은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과 민중들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33인의 민족대표와 20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1919년 3월 1일,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일어났다. 어린 김산 역시 만세운동 같은 평화시위로 조선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가슴이 터질 정도로 기뻤고,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거리를 뛰어다닐 정도로 독립의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3.1운동의 실패와 일본의 강경대응을 지켜보면서 어린 김산은 비폭력 평화 투쟁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한낱 언어 나부랭이를 믿다니.” 그는 자신의 믿음이 산산이 조각나는 느낌을 받으며 마치 지진 속에 살아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가 믿었던 기독교의 순교 정신은 영웅적인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외치면서 기독교인들이 한 일이라곤 찬송가나 민족 독립가를 부르는 것 정도였다. 일본군은 그들을 향해 총을 갈기고, 대검을 휘둘렀다. 기독교 신자들은 도망치지도, 저항하지도 않고 하늘을 보며 계속 기도하면서 죽어갔다. 김산은 처음에는 일본의 잔인성에 분노했지만, 나중엔 저항하지 않는 조선인들에게 분노하기 시작했다. ‘힘의 의미와 무저항의 공허함’을 깨달은 것이다.


일본인들은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는데, 3.1운동 참가자들은 평화만 외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 한 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이렇게 하면 천당 갈 수 있겠지’라고 잔인한 조롱을 일삼았다. 기독교 신자들은 그 십자가 밑에 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울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자들 뿐 만이 아니다. 불교도, 천도교도 폭력을 거부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평화적으로 싸우자.” 이것이 3.1운동의 구호였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롭지 않았다.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불태웠다.


평화의 무력함을 깨달은 김산은 평화를 앞세운 기독교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교회가 조선에게 가장 훌륭한 기구라고 믿었던 그의 믿음은 산산조각 났다. 한 미국인 선교사는 조선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리고 있으며, 죄의 보상이 끝나면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을 했다. 김산은 도대체 왜 저 제국주의 침략 국가들은 입으로만 기독교를 떠들어도 하나님이 벌을 내리지 않고, 피해자인 조선만 기독교 윤리를 실천해야 하냐고 되묻는다.


3.1운동을 이끌었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역시 위선적인 이념에 불과했다. 민족자결주의는 1차 대전의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만든 수단에 불과했으며, 제국주의자들은 억압받는 민족들의 독립에 관심도 없었다. 그저 ‘말’, ‘언어’ 뿐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기독교인들의 기도도, 그저 말 뿐이었다. 그는 이 말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총을 든다.


2. 무정부주의적 테러리스트에서 공산주의자로


김산은 자신의 정치경력이 3.1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3.1운동이라는) 비극에 뒤이어 절망적인 테러 운동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한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어느 정도 평등의 기초를 이루려던 평화적인 호소가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김산을 비롯한 조선의 청년들은 총을 잡고 일본을 향해 무력을 행사한다. “민족주의자와 ‘아메리카 민주주의자’는 깨어진 꿈의 조각을 안고 상하이에서 독립적인 해외망명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었다.”


김산은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무장을 하고 일본군의 폭력에 맞서 싸운다. 비록 평화주의를 버리고 항일 무장투쟁에 뛰어들긴 했으나 그는 여전히 조선민족의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상하이에 도착하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 정치사상과 논리를 경험하고 난 뒤 그는 테러리스트와 무정부주의자들에게로 기울기 시작한다. 이는 아마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김산이 평화주의를 버리고 무장 투쟁을 선택한 이상, 그가 무정부주의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당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던 중심 세력이었다. 그 이유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일본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처럼 조선민족의 국가를 건설하라고 말하지 않고, 국가를 파괴하라고 외친다. 당시 무정부주의자들이 파괴해야 할 국가는 바로 일본 제국주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도, 일제를 가장 강력하게 거부하고, 일제를 가장 파괴하고 싶어 하는 무정부주의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김산도 그랬다.


톨스토이의 사상도 김산이 무정부주의자가 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산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 중에는 톨스토이에 심취해 있는 이들이 많았다. 이광수, 김약산(김원봉) 등이 톨스토이의 광팬이었고, 김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톨스토이의 사상을 접하기 시작해, 1922년까지 톨스토이적 이상주의자였다. 톨스토이는 가장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준 무정부주의자였다.


그러나 김산은 곧 무정부주의와 톨스토이에도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톨스토이의 말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김산은 “톨스토이주의는 어떤 것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톨스토이주의는 비정치적 지식인 대중, 부르주아 혁명가,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반동적인 사람에게 모두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톨스토이는 위대한 사상가이다. 그러나 이 말을 조금만 비틀어보자. ‘무엇으로든 발전할 수 있는’ ‘모두에게 좋은’ 사상이 좋은 사상이 될 수 있을까? 톨스토이주의는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태도’나 ‘방법’이지, 변혁과 혁명의 대안을 제시할 ‘이념’은 아닐지 모른다. “톨스토이는 진리를 나타내고 보편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나타내지만, 운동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톨스토이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투쟁하고 있으며, 절대로 동의와 해결에 도달하는 법이 없다. 톨스토이의 철학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모순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러므로 해결책을 구하려는 맹목적인 노력 속에서 직접적인 행동과 투쟁으로 나아갈 필연성”을 제공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테러하고, 국가를 전복시켜야할 필연성은 제공하지만, 무엇을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없다.


무정부주의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그들은 강력한 파괴를 원하지만, 어떤 국가를 건설해야할지, 어떤 조선을 건설해야 할지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모든 국가는 권력이자 억압이며, 우리는 모든 권력과 억압을 거부해야 한다. 일단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한 이후, 사회의 공산주의화를 이루려했던 러시아혁명의 방식을 거부했던 이들이 무정부주의자들이다. 그들에게는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방법’이 있지만, 투쟁의 반복이 있지만, 대안이 없었다.


3. 마침내, 공산주의자로


혁명가 김산은 해결책과 대안을 원했다. 그런 그 앞에 등장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였다. 김산은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 이동휘를 보며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상을 그렸고, 그의 동지 김충창을 통해 공산주의를 본격적으로 습득했다. 1921년 베이징에 간 김산은 공산당선언, 국가와 혁명 등의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을 섭렵하고, 과학적 대중투쟁의 중요성과 테러 행위의 무익함에 대해 깨닫는다. 무작정 일본군을 잡아 죽이고, 테러를 가해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무정부주의적 테러리즘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대안, 그리고 대중운동의 기반을 닦는 것이 중요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혁명에 대한 대중적 기반을 강조하는 공산주의 운동만이 조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희망이라고 단정했다.


김산은 톨스토이 역시 10월 혁명을 생전에 경험했다면 혁명으로 돌아섰을 것이라 말한다. 톨스토이는 해결책을 찾았지만, "너무나 정직했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싼 현실이 아직 해결의 타당성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래서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김산에게 그 해결책이란 공산 혁명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며, 지독한 공산주의자로 변모한다. 그는 상호협력의 정신과 동지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이념이 공산주의라고 믿었으며, 이기주의라는 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사가 본인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사회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김산에게 닥친 과제는 단순히 '조선의 독립'이 아니다. 독립한 조선은 공산주의로 건설되어야 한다. 그가 단순히 조선의 독립만을 바랐더라면 그는 민족주의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독립한 조선이, 상호협력과 동지적 책임감으로 굴러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민족주의자가 되는 대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해 싸운다.


그는 민족주의자에서 벗어난 동시에, 무정부주의를 내세운 테러리즘에서도 벗어났다. 무작정 파괴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김산은 공산주의자가 된 이후 정확한 정세 분석과 대중적 기반과 조직 없이 함부로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것은 대책 없는 폭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중국 공산당이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들의 무장 봉기를 조직하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이를 거부했다. 농민들을 조직화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만일 봉기를 일으켜서 권총을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장래 가능성이 모조리 깨지어 버리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산은 공산주의를 신봉했지만 여전히 '실천'의 혁명가였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에 따라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고자 했지만,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기반으로 유연하게 이론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첫사랑이자 고집 센 공산주의자였던 류링에 대한 그의 논평에서, 유연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나는 그녀를 훌륭한 혁명가로 만들어 준 바로 그 여러 가지 확고부동한 성격들이 또한 그녀를 고집불통이고 독단적인 사람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객관적인 상황이 변해버린' 최후의 순간까지도 절대로 그것을 바꾸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종종 그녀에게 말하곤 하였다, '당신은 당의 기본노선보다 더 지독해요. 새로운 사태에 강제로 말려들어가기 전에 좀 더 유연성을 가지고 거기에 적응하도록 해야만 해요." 이러한 그의 성격 때문에, 그는 이념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려는 당과 종종 충돌한다.


당은 그를 우파로, 트로츠키주의자로, 친 국민당파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는 우파도 트로츠키주의자도, 국민당파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무산계급을 대표하고 조직하여 공산주의를 이루고 싶었던 실천의 혁명가였다.


4. 결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좌절하고 일제에 투항했을 때, 왜 김산은 끝까지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울 수 있었던 것일까? 그가 일제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일제에 가장 위협이 되는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이론에 경도되어 이론이 맞지 않으면 절망하고 포기하는 이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발 딛고 있는 곳에서 공산주의를 이루려 실천하고, 농민과 노동자, 민중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실천과 경험 속에서 오류를 수정하려고 했다. "다년간의 마음의 고통과 눈물을 통하여 '오류'가 필수적이며 따라서 선이라는 것을 배웠다. 오류는 인간 발전의 통합적인 일부분이며. 사회 변화 과정의 통합적인 일부분인 것이다. 사람들은 말을 믿을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지가 않다. 사람들은 실험을 통하여 비로소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실험은 사람들의 안전장치이며 권리이다. 거짓을 배우지 않는 자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의 교과서는 잉크로 쓰인 것이 아니라 피와 고통으로 쓰인 것이다." 김산은 실패와 패배를 반복하여 승리자로 남았으며, 조선민족과 조선의 민중들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최후까지 혁명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