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때 학회에서 쓴 발제문
국제관계이론: 근대국제정치질서의 국제정치이론과 한국
1. 들어가며
우리는 현재 서구에서 만들어진 근대국제질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당연하게 이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 체제는 몇 세기 전만 하더라도 매우 낯선 체제였으며, 특히 이 체제가 동아시아에 들어오는 과정은 매우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이번 장에서는 현대 국제질서를 지배하는 근대국제질서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이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아시아에 유입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2.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서구세계와 국제정치이론
국제정치학이란 학문이 공식적으로 출현하게 된 시기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하지만 국제정치학은 20세기 초 갑자기 등장한 학문이 아니라, 이전 시대 국가 간, 정치집단 간 관계를 고찰한 많은 사상가들과 이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학문이다. 이 chapter에서는 국제정치학의 기초가 된 다양한 사상들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20세기 초 국제정치학의 주요 패러다임 중 하나인 현실주의의 사상적 시조는 15세기 등장한 근대국가와 국제적 무정부 상태에 주목한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로 알려져 있다. 15세기 유럽에서는 황제와 교황의 보편적 권위로부터 벗어난 주권 국가들이 등장했고 국가 간의 정치적 관계는 중앙정부의 통제가 없는 무정부 상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마키아벨리는 국가들이 국가 이익을 위해 군사력, 외교력을 이용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주목하며 국제관계를 이익, 권력만이 존재하는 힘의 질서로 규정했다. 이러한 국제질서는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유럽 전체가 주권 국가로 재편된 17세기에 더욱 확고해진다. 나아가 국가들 간의 보편적인 규범, 권위는 없으며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만이 국제관계의 본질이라는 생각은 18, 19세기를 거쳐 유럽의 국제정치를 지배하는 사상이 된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이론이 국가들이 전쟁을 통해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하고, 세력균형점에 도달할 때까지 끈임 없이 동태적으로 활동한다는 세력균형론이다. 근대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이 세력균형론은 이후 20세기에 들어서 현실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
국제질서를 국가 간의 경쟁, 갈등 관계만으로 설명하는 비관적인 시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들 간의 협력, 연합을 통한 평화와 공존을 강조하는 시각들도 존재했다. 유럽에 예전부터 존재하던 Chirstian Repubic 사상과 유럽을 하나로 통치했던 로마제국과 교황의 존재가 이러한 시각의 근거였으며 생 피에르, 쉴리, 칸트 등의 사상가들은 유럽이 근대 국가단위로 재편되어있지만 이들 간의 연합(Confederation)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특히 칸트는 “이성”을 바탕으로 국가들이 타협과 협력에 의해 연합체를 이루고 궁극적으로는 영구적인 평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영구평화론”을 주창함으로써 후대의 국제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이상주의의 원형이 된 윌슨의 국제정치사상과 자유주의 국제정치가들의 "민주평화론"이 칸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하고 유럽 협조체제를 창시한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 역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빈회의를 통해 국제법과 보편적으로 인정된 도덕적 원칙, 그리고 조약의 의무에 의해 구성된 연방 체제이자 집단안보체제를 창출하려 했다.
국가 간 협력을 언급한 다른 사상가는 애덤 스미스이다. 스미스는 이윤 극대화를 위해 활동하는 경제 행위자들이 국제적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하여 국가 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시장을 통한 국가 간 상호의존이 발생하고, 상호의존을 통해 평화로운 국제관계가 유지된다는 생각은 후대 시장평화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국제정치 이론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의 주장처럼 경제적 행위자들이 항상 평화를 원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자본-노동간 착취가 존재하고 이러한 문제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크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주목한 독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는 자본의 법칙이 정치, 사회, 문화를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국제관계를 결정짓는다고 주장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적 관계에 의해 정치, 사회, 문화와 국제관계가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제국주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 논리가 국제관계를 결정짓는다는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다. 레닌 등의 제국주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이윤 추구를 위한 자본주의적 팽창(구체적으로 식민지 정복)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경쟁이 극한에 이르러 제 1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논리가 국제관계를 결정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세계체제론과 종속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다.
3.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세계와 국제정치이론
* 윌슨 14개 조항 * 기존의 비밀외교를 폐지하고 민주적 과정에 의해 외교정책을 결정할 것 자유로운 통상을 허용할 것 이탈리아 국경을 재조정하여 민족자결을 보장할 것 … ⑭ |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본격적인 국제정치가 실현되었고, 동시에 미국과 일본이라는 새로운 강대국이 출현하기도 했다. 또한 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여성과 같은 소수 사회집단의 지위도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많은 학자들은 1차 세계대전의 발생 원인을 찾기 위한 이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첫째로 1차 세계대전은 근대 국가들 사이의 이익 추구와 세력균형의 산물이었다는 시각과, 둘째로 제국주의 세력들 간에 식민지 쟁탈전이 극한에 다다랐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당시 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미국의 입장에서, 윌슨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을 19세기 유럽 국제 정치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이상주의의 대표자로 여겨지는 윌슨은 당시 전쟁의 요인이 되었던 ‘구외교’를 극복함으로써 세계 평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1918년 소위 ‘윌슨 14개 조항*’ 이라는 전쟁수행 및 전후 처리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그가 생각한 국제정치의 새로운 원칙은 신외교 수행, 통상자유 확보, 민족자결주의, 국제연맹 성립 등이다.
이와 같은 윌슨의 사상이 전후 처리과정에서 모두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후 시민과 지식인 세력이 국제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국제정치학이 새로운 학문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워싱턴 조약, 켈로그-브리앙 조약과 같은 다양한 국제제도가 출현하여 19세기까지의 국제정치와는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 현실주의
니부어 |
카 |
모겐소 |
기독교적 현실주의 인간은 자기애라는 본성에 따라 움직이며 자기애를 위한 권력욕이 인간의 정치적 행위의 기반이 된다. “권력정치” |
이상주의와 이상향주의 분석 정치적 현실주의용어 보편화 이상주의 - 특정집단의 이익을 보호하는 이데올로기 |
인간의 본성-이기성과 권력욕 인간보성에 기초한 국제정치의 본질은 “권력정치” |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을 대표로하는 이상주의자들의 낙관적인 전망이 계속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국제정치현실이 잘못되어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소련공산주의의 성장, 파시즘의 등장, 경제대공황 … 독소불가침조약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은 그동안 낙관적이었던 시각을 비판하는 “현실주의” 이론가들이 탄생하는 데에 지배적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니부어, 카, 모겐소 등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현실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이론의 국제정치관을 비판하는 동시에, 윌슨의 낙관주의가 가지고 있는 순진한 이상주의적 성격을 비판했다.
4. 근대 변환기 동아시아 국제정치관의 전개과정
개항을 시작하기 이전인 19c 이전,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럽과는 판이한 질서를 지니고 있었다. 근대화로의 이행에 성공한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화’를 필두로 하는 전통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19c 동아시아 국가들의 개항과 근대화 과정은 단순한 문명의 만남이 아닌 ~의 총체적 변화였다.
동아시아 3국가 간의 근대화 과정에서의 국제정치관 변화의 큰 맥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3국 모두 서구 문명을 전쟁으로 부정하고 배척하는 쇄국과 양이의 과정을 거친다. 그 뒤 서구문명의 힘을 파악하고 그들의 힘과 기술을 받아들이되 자국의 정신은 지키려는 절충의 노력이 나타난다.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 그리고 일본의 화혼양재가 이러한 노력의 대표적 예이다. 그 뒤에는 이러한 소극적 변화의 한계를 인식하고 적극적인 개혁관을 지니게 된다. 정신적인 측면까지도 서구적으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면적 개혁관을 지니게 된 뒤, 특히 조선과 일본은 ‘만국공법’이 대표하는 이상주의적 국체정치관에 큰 기대를 건다. 그러나 국가의 힘과 크기에 관계없이 주권과 독립을 보장해준다는 내용이 단지 이론일 뿐임을 알고 점차적으로 현실주의적인 국제정치관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국제정치관의 성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상이 바로 적자 생존을 필두로 한 사회진화론이다. 이 이후로 3국은 본격적인 문명개화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중국의 변법자강운동, 그리고 조선의 갑신정변이후 개화파의 행로가 그 예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개항과 근대화과정에는 개별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일본은 3국 중 가장 신속하고 근본적인 개화를 함으로써 훗날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초석을 다진다. 중국은 위와 같은 국제정치관의 변화는 존재했지만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데 실패하여 반식민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조선은 전통적인 국제정치관을 벗어나는데 한계를 보임으로써 결국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1) 동아시아 전통질서와 지역질서관
황하문명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지역질서는 동심원적으로 퍼져나갔다. 중원을 차지하려는 여러 민족의 끊임없는 쟁탈전 속에서 최초로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는 동아시아 지역을 하나의 천하로 보고 자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보는 ‘천하형 국가’를 세워 자국을 중심에 놓는 지역질서를 개념화했다. 이와 같은 ‘천하질서’와, 주변 민족들을 저수준의 오랑캐로 인식하는 ‘화이질서’속에서 조공을 받거나 주변 민족들을 제후로 봉하는 등의 책봉의 정치적 관계를 유지한다.
주목할 것은 동아시아의 전통지역질서는 구성 원리의 측면에서 다른 지역, 특히 유럽지역질서와는 판이했다는 것이다. 모든 정치 단위들이 형식상 동등한 정치적 주권을 소유하고 많은 단위들 간의 주권적 평등을 인정하는 근대 질서와는 달리 동아시아 전통지역질서는 위계적, 동심원적, 혹은 피라미드형으로 조직화 되어있었다. 반드시 ‘중국 중심질서가 동아시아의 전통지역질서이다.’ 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유럽과는 다른 위계적 질서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2) 중국 국제정치관의 변화
아편전쟁 이전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자신들이라는 중화사상에 익숙해있었다. 자급자족의 경제를 지향했던 중국은 간혹 시도되는 서구의 교류노력에 매우 소극적으로 반응해왔다. 그러나 19세기 초 서구와의 교류는 중국 지배층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된다. 서구와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중국은 서구 문물의 우월성을 인식하게 되며 동시에 경제·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개화된 문명국가로의 전체적 변모가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중국에 세계의 역사·지리·형세를 소개하는 최초의 저술인 『사주지』(린저쒸 저)를 시작으로 중국의 국제정치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속속 출판된다. 이후 아편전쟁,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등을 거치면서 중국의 대외인식과 국제정치관은 급속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과거 유교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과 공맹의 도를 국민정신과 도덕의 근본으로 하면서도, 서양의 신지식을 수용하여 이를 절충하려고 한 양무론, 혹은 중체서용론의 세계관, 국제정치관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중체서용과 같은 부분적·피상적 개혁이 가지는 한계를 절감하고 보다 근본적인 원리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의식이 대두했다. 즉 정치제도는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 부국강병의 이상을 실현하여 서구국가들과 동등한 주권국가를 수립 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권국가간의 국제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인식이 고조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의 변화는 19c 후반의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태평천국의 난의 실패 이후 청 정부는 양무운동을 통하여 자강(自强)하고자 한다. (이는 동치중흥, 동광신정이라고도 하며 일부 학자들은 자강운동, 자강신정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양무운동은 해방론이라는 독특한 국제정치관을 기반으로 한다. 서구의 외압을 막고 중국의 전통적 통일제국의 위상을 견지하며 기존의 체제를 지키려는 해방론이 양무운동을 일으킨 원동력이 된 것이다. 중국은 해방론에 근거하여 육·해·군 신무기체계 생산에서부터 광공업, 해륙 운수업 등 경제 변혁을 꾀했으나 전국적 차원에서 통일된 계획아래 추진하지 못했다는 장애에 부딪혀 제한된 성과만을 거두었다.
양무운동의 한계가 나타나면서 서구의 이념과 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변법적 대외의식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특히 두드러진 일본의 발전에 영향을 받은 변법사상가들은 중국의 근본적 인식의 변화를 주장한다. 변법자강파들은 청·일 전쟁 패전과 그에 따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 등 다가오는 망국의 위기감을 절실히 깨닫고 단순히 무기·기술만을 도입하는 것에 한계가 있으며 전통적인 정치·사회·경제·교육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해야만 중국이 근대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했다.
변법자강파의 대표자인 캉유웨이는 진화의 원칙이 현실을 지배하는 원리라고 강조하며 이에 걸맞은 다양한 제도개혁을 주장했고 량치차오는 서구의 사회진화론, 사회계약론, 국가유기체설, 국가법인설 등 다양한 논리를 수용하여 변법의 필요성과 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량치차오 생각의 기저에는 ‘이제 세계는 기존의 천하관으로는 파악되지 않으며 천하관은 명백하게 붕괴되었다.’라는 국제정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깔려있었다. 동시에 만국공법과 평천하 이상의 부족성을 실감하며 량치차오는 세계를 자국의 존망이 달린 국가 간 각축장으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중국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국가주의를 제창한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추진한 변법자강운동은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혀 백일유신으로 끝나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적 인식은 이후 혁명파에게 큰 보탬이 되었다. 결국 중국은 삼민주의에 기초한 혁명을 통해 근대적 국제정치관이 자리를 잡고 이에 기초한 대외정책이 추진된다. 이렇게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시작된 개항의 물결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국제정치관의 변화를 보였다.
(3) 일본 국제정치관의 변화
일본은 한국보다 중국의 영향을 덜 받은 독자적인 성향이 강한 국가였다. 중국과는 경제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 지배층의 이념 자체가 달랐다. 또한 자국 중심적인 문화가 강해서 그들은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중화사상의 영향을 덜 받았고, 따라서 이 사상을 버리고 유럽의 근대 국제 체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일본 개항의 결정적인 계기는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의 흑선의 출현이다. 미국은 중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일본의 개국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페리제독은 1853년에는 대통령의 친서만을 전달하고 돌아가지만 1854년에는 다시 돌아와 무력으로 에도 바쿠후(막부)를 압박한다. 에도 바쿠후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그 해 3월 미. 일 화친조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평등 조약의 체결로 인해 반(反) 에도 바쿠후 세력은 막부의 무능함을 이유로 막부를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지니게 된다.
이후 일본은 바쿠후를 중심으로 한 개국파와 덴노(천황)를 중심으로 한 외국 배척파(조이파)로 나눠지고 개국을 두고 부딪치기 시작했다. 조이를 주장한 사쓰마, 조슈는 이른바 유항들이였는데, 유항은 바쿠후의 무능함을 일찍이 인식하고, 하급무사들을 대거 등용하여 개혁에 성공한 이들이다. 유항들은 바쿠후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바쿠후의 정권을 덴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손노(존왕)론을 내세웠다. 또한 쇼군의 후계자 문제와 미. 일 수호통상조약에 이이 나오스케라는 다이묘가 천황의 허락 없이 조인(1858)한 것을 계기로 손노조이파들은 본격적으로 바쿠후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도전을 경계한 바쿠후는 1858년부터 2년간 인세이 다이고쿠라 하는 반 바쿠후세력의 몰살을 자행한다.
그러나 이후 바쿠후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반 바쿠후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이 바로 개국 이후 자체개혁을 통하여 제도를 고치고, 하급부시출신의 젊은 인재를 대거 등용하여 막강한 상업자본의 바탕 위에 무기와 군사를 늘려나간 사쓰마번과 조슈번이다. 사쓰마는 손노조이파 내부의 온건파였고, 조슈는 강경파였다. 사쓰마가 천황을 먼저 장악함으로써 사쓰마와 조슈의 세력 다툼에서 사슈마가 우위를 점한다. 이후 사쓰마는 현재 바쿠후와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천황의 조정과 쇼군의 바쿠후를 하나로 합치는 고부갓타이(公武合體)를 주장한다. 이전에도 형식적으로는 이러한 체제였지만 현실적으로는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천황의 힘이 커지고, 국제 정권투쟁으로 자칫 잘못하면 중국이나 인도와 같이 식민지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사쓰마가 고부갓타이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조슈는 찬성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사쓰마의 일부 부시들이 고부갓타이에 불만을 갖고, 바쿠후 토벌음모를 세우다 발각됨으로서 조슈는 사쓰마를 제치고 손노조이 운동의 중심이 된다.
이 때 외국 세력을 배척하던 반 바쿠후 세력의 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사쓰마의 부시가 영국의 상인을 죽이게 되는 사건으로 인해 사쓰마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사쓰에이전쟁-1863) 영국의 신무기에 크게 당한 사쓰마는 이를 계기로 외국세력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보다 개화하여 자국의 힘을 키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조이에서 개국으로 정책을 전환하게 된다. 이 때 내세운 명분이 바로 바쿠후 타도 즉 도바쿠다. 한편 이때까지도 조이를 주장하며 천황을 끼고 있던 조슈는 쇼군을 교토로 불러올리고 동시에 시모노세키 해협을 항해하는 미국상선에 대포를 쏘았다.(1863년) 이 사건은 바쿠후와 사쓰마 그리고 외국세력을 자극했고, 사쓰마와 바쿠후는 고부갓타이로 힘을 합친다. 1863년 8월 고부갓타이 파는 교토를 습격, 조슈를 몰아내는데 이를 8. 18정변이라 한다. 이후에도 조슈는 사쓰마를 다시 몰아내기 위해 교토를 공격하지만 되려 고부갓타이 군대에 당하고 이때를 틈타 바쿠후는 조슈정벌에 나선다. 또한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연합하여 외국배를 공격한 조슈를 토벌하러 나선다. 4국 연합국의 17척의 군선과 5천여 명의 병력으로 조슈의 시모노세키를 공격하여 육지까지 점령하였다. 1년 전의 사쓰마와 같은 패배를 당한 조슈 또한 개국하여 외국의 기술을 배워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변화의 명분으로는 역시 바쿠후 타도인 도바쿠를 내세운다. 하지만 1864년 바쿠후의 공격에 조슈는 항복하고 손노파는 큰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이듬해 조슈에서 내전이 터진다. 이 내전에서는 손노파가 이겨서 조슈는 도바쿠를 한층 강하게 주장하여 바쿠후와 정면대결을 하게 된다. 바쿠후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조슈는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도사출신의 사카모토 료마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쓰마와 다시 한 번 동맹을 맺는다. 두 한들은 모두 손노파이자 개국 파였고, 신무기의 위력을 알았으며 도바쿠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현실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에 따라 1866년 1월 12일 사쓰마와 조슈의 동맹인 삿쵸동맹이 형성된다.
삿쵸동맹과 바쿠후와의 전쟁에서 바쿠후가 패함으로서 바쿠후는 지배력을 크게 상실하게 된다.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새로이 15대 쇼군의 자리에 오른 때와 같은 때 메이지(明治) 천황이 천황의 자리에 오른다. 1867년 삿쵸와 바쿠후의 대결이 다가오고 있을 때 도사에서 새로운 제안을 하나 올린다. 내전은 식민지 지배로 이어질 수 있으니 천황을 일본의 최고통치자로 인정하고, 한을 기초로 한 의회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바쿠후와 조정을 완전히 하나로 합치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바쿠후의 권리를 천황에게 정식으로 반납하는 다이세이호칸(大政奉還)이었다.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의회제도에서의 바쿠후 세력 유지를 생각하고 바쿠후의 권리를 천황에게 바친다. 1867년 다이세이호칸으로 바쿠후의 권력이 천황에게 돌아가고 일본은 왕정복고를 선언한다. 삿쵸 지도자들을 9월에 비밀회의를 열어 바쿠후 타도를 결의한다. 쇼군인 요시노부는 이에 반발하여 1868년 1월 1일 보신전쟁(戊辰戰爭)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바쿠후와 조정은 또 한 번 극적인 협상에 성공, 쇼군은 근신 처분시키고 나머지 바쿠후의 인사들에게는 안전을 보장하고 불이익을 주지 않음을 전제로 바쿠후는 스스로 항복하게 된다. 그 해 8월 메이지 천황은 즉위식을 올리고 연호를 메이지로 고친다. 이때 이루어진 개혁을 메이지 유신이라고 한다. 부시계급이 중심이 된 봉건제 농경사회에서 상공인을 중심으로 한 근대 산업국가로의 변화가 이뤄지고 자급자족의 지역사회에서 도쿄의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가로의 전환과 민주사회로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의 국제정치관은 매우 이상주의적이었다. 그러나 1871년 사절단이 구미를 시찰하고 난 뒤에는 현실주의적인 국제정치관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국제정치관을 대표하는 사람이 후쿠자와 유키치다. 그는 일본의 정신에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교류해야 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주장함으로서 일본이 후에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4) 조선 국제정치관의 변화
조선은 동아시아 전통질서 속에서 중국과의 사대자소관계를 가장 전형적으로 이루어온 왕조로 알려져 있다. 조선 이전에 고구려와 고려 등은 국력이 강할 때마다 중국에 대한 자립적 세계관을 표방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적 세계질서가 자리 잡고 조선인들은 명에 대한 사대주의적 대외관계를 심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명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소위 재조지은의 인식을 확고히 하였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선은 스스로 소중화를 자처하며 청나라와 형식적 사대관계만을 유지하고자 했다. 조선 후기 북학파를 중심으로 한 대청관의 변화가 일어났지만, 전반적으로 조선의 대청인식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고, 그 인식의 정도도 실용부문에 한정됨으로써 기존의 대명사대의식을 탈피한 새로운 지역질서를 정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청과 일본의 경우처럼 조선도 아편전쟁의 조식과 일본의 개항, 그리고 이양선의 출몰 등과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 새롭게 등장한 서구를 인식하고 대처하는 방법에 관계 많은 혼란과 변화를 겪었다. 조선은 크게 해방론->원용부회론->양절체제론->자강균세론->국권강화론 등의 국제정치관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이며, 새롭게 등장한 서구체제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러나 19세기 세도정치 속에서 보수화된 조선은 내부 사회모순 축적과 이양선의 출몰 등 변화의 동인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개혁의 필요성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쇄국과 척사의 국제정치관으로 연결되었다. 위정척사와 양이의 국제정치관은 기존의 천하질서관에 기초하여 오랑캐인 서구세력의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박규수와 같은 이는 신미양요 당시 해방론을 주창하게 되는데 해방론은 서양세력의 존재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이를 인정한 상태에서 조선을 지켜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도와 질서를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위정척사보다 진일보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다양한 국제정치관 사이의 논쟁이 시작된다. 대표적인 척사파 인물인 최익현은 서양은 물론 일본에 대해서도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일본과의 통교는 양이와의 결탁의 시초라 주장했다. 한편, 조선인들은 청조와의 사대관계를 강화하면서 청조의 군사적 힘에 의존했지만, 개국 후 점차 새롭게 전개되는 일본이나 청조에 대해 조선의 적대적인 태도를 보면서 청조의 힘이 결코 절대적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880년 8월 2차 수신사로 도일했던 김홍집이 일본 주재 청국 공사참사관 황쭌셴<조선책략>을 받아 온 이후 조선은 심대한 국제정치관의 변화를 겪게 된다. 황쭌셴은 조선의 자강을 역설하고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과 결맹하고 미국과 연계하여 자강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동시에 조선은 서양의 국제법인 만국공법을 수용하고 조선의 국제정치관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은 만국공법을 배워 영국의 거문도점령 등과 같은 사건에 이를 원용하여 서구의 침탈에 대처 하였다. 국제정치관은 1880년대 사실상 중국의 조선 지배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이 때 개화사상에 의거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과 같은 개화파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1870년대 청의 양무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일본의 문명개화론의 영향을 받아 신지식과 새로운 대외관 그리고 일본모델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중화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조선의 대내적 주권확립과 인민의 권리 강화를 통해 일군만민적 정치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개화파의 급진적인 노력이었던 갑신정변을 1884년 3일천하로 단기간에 실패로 끝나고 만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유길준은 개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여 소위 양절체제론적 국제정치관을 주장했다. 양절체제론을 통해, 속국과 증공국을 구별하여 조선이 중국에 증공한다는 이유로 중국의 속국이라는 인식을 비판하고 조선의 자주를 강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국제정치관의 한계가 명백해지게 된다. 강력한 국력과 세력균형에 대한 현실주의적 인식 없이는 생존과 문명개화를 이룰 수 없다는, 자강균세의 국제정치관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례로, 18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유길준은 국제법 긍정론을 점파 탈피하여 국제상황을 약육강식의 시대로 보기 시작한다. 이처럼 부국강병과 균세를 강조하는 국제정치적 인식은 비단 유길준뿐만이 아니라 1890년대 조선에 상당히 넓게 퍼진 대외관이었다.
이후 조선은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국권을 상실하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국권회복론을 통해 국권을 되찾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의 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강에 힘쓰자는 동양주의론과 단호히 일본에 맞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신채호 국가주의자가 이 시대의 국제정치관을 이루는 중요한 흐름이 되었다. 조선은 결국 근대 이행기에 근대적 국민국가로 탈바꿈 하는데 실패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35년간 일제의 받게 된 것이다. 근대적 국제정치관을 하루빨리 정립하여 자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5. 생각해볼 문제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는 근대국제질서의 패러다임이 확장하는 과정에서 모두 이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 나라는 다른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된다.(중국은 반식민지 상태, 조선은 식민지,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으로 변화) 비슷한 환경 속에서 세 나라의 다른 정치적 결과를 가져온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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