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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인문, 사회과학

다시 한 번, 모두 안녕들하십니까

다시 한 번, 모두 안녕들하십니까
[서평] 안녕들하십니까 /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지음 / 오월의봄 펴냄

지난해 겨울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물음이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12월 10일 고려대학교에 하나의 대자보가 붙었다.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천 명이 직위 해제되고,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초고압 송전탑에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는 이 “하 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다”는 물음이었다. 이 질문에 사람들이 천 장이 넘는 대자보로 응답했다. 대학교, 고등학교, 버스정류장 등 각자가 생활하는 공간과 외국의 거리에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들이 하나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펴낸 <안녕들하십니까>는 지난 겨울 한국사회에 던져진 수많은 질문과 응답을 정리한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녕들하십니까’라는 형식을 빌러 각자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는 노동자들도, 낮은 임금과 노동조건에 신음하는 청소노동자들도, 삼성의 무노조 정책에 맞서는 삼성노동자들도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비정규직도,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노동자들도, 송전탑과 핵 발전에 반대하는 시민들도 ‘안녕들하냐’고 물었다. 높은 등록금과 나쁜 대학들의 횡포에 저항하는 대학생들도, 획일화된 입시교육에 반대하는 중고등학생들도 자신의 학교에 대자보를 붙였다. 성소수자들은 대자보를 통해 사회의 혐오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고, ‘김치녀’라 불리던 여성들도 대자보를 통해 한국사회의 여성혐오를 비판했다. 

  
▲ 지난해 12월 14일 고려대 정대후문에 모인 주현우씨와 ‘안녕들하십니까’ 모임 참가자들. 사진=주현우 페이스북

왜 수많은 사람들이 ‘안녕’이라는 상투적인 인사말에 응답한 것일까. 안녕들하십니까의 핵심은 ‘안녕’이 아니라 ‘들’이다. ‘안녕들하십니까’는 우리가 친구들과 나누는 ‘안녕?’라는 상투적인 인사말과 다르다.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나의 인사말은 누군지 알 수 없는 불특정다수를 겨냥하고 있다. ‘안녕들하십니까’는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우리 서로 관심 좀 가지고 살자는 뜻의 물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통해 철도민영화, 밀양 송전탑,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등 공공의 의제와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공공의 의제가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나의 문제이자 우리의 문제’라는 점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대자보였을까.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게시글들과 댓글들은 넘쳐나는 표현의 자유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과 마주하지 않은 채 내 이름을 걸지도 않은 채 쉽게 뱉어내는 말들을 과연 ‘나의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녕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손으로 직접 대자보를 썼다. 누군가 대자보를 써서 붙이면, 익명성에 가려진 산발적이고 피상적인 피드백 대신 ‘나도 안녕하지 않다’는 또 다른 대자보가 붙었다. 손으로 직접 쓴 대자보에는 사람의 감정이 녹아들어 있었고, ‘너만 안녕하지 못하다’는 감정을 서로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저자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안녕들 하십니까 출판팀 (엮음) 지음
출판사
오월의봄 | 2014-03-2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한 장의 대자보가 불러일...
가격비교


‘안 녕들하십니까’는 한국 언론에도 질문을 던졌다. 지금의 언론이 안녕하지 못한 현실을 충실히 전했다면,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언로’가 되어 주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대자보로 소통하는 현상이 발생했을까. ‘안녕들하십니까’는 철도민영화의 본질 대신 ‘시민 불편’만 읊어대고, 밀양 송전탑의 본질 대신 자극적인 충돌 장면만 전하는 언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김정은 눈썹과 대통령 옷차림에만 관심 있는, 너무나 안녕한 언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 지만 몇몇 언론은 반성은커녕 기존의 행태를 반복했다. 이들은 이 현상이 왜 발생했는지 보다 첫 번째 대자보의 주인공 주현우가 노동당(구 진보신당) 당원이라는 점에 더 관심을 보였다. 순수한 대학생들이 아니라 운동권 학생들이 주축이라고 떠들었다. 본질이 아닌 곁가지로 자극적인 선동을 일삼는 행태를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않는 한 ‘안녕들하십니까’와 같은 현상은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것이다.

지 난 겨울의 열풍은 이제 가라앉았다. 더 이상 대학과 거리에 대자보가 쏟아지지 않으며,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의 ‘좋아요’가 늘어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던 경험이 남아 있다. 우리가 ‘안녕들하십니까’를 한 때의 해프닝으로 기억해선 안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