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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단상

내가 노무현을 추모하는 방법

내가 노무현의 죽음에 슬퍼했던 이유는 다시 노빠가 되자는 식의 자기반성이 아니었다.

조중동은 이명박과 노무현을 비교하며 이명박은 '실용정부'인 반면 노무현은 '이념정부'라고 규정했는데, 그 규정은 완전히 전도된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이념을 널리 실천하면서, '실용정권'이라는 프레임으로 그 이데올로기를 가리려는 제대로 된 이념정권이다. 이념이 가진 '허위와 기만'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실용정부라는 기표와 신자유주의라는 기의는 완전히 자의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의적임에도 불구하고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는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신자유주의야말로 가장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 이것이 이명박의 1차적인 기만이다.

이명박 정권의 또다른 기만은, 신자유주의라는 기의가 또 하나의 기표로 작용한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두 가지 계몽이 필요하다. 이명박은 실용 정부를 가장한 신자유주의 정권이며, 신자유주의 정권을 가장한, 신자유주의라는 기표로 다 메울 수 없는 또다른 기의를 가진 자이다. 국가 주도로 토건 사업을 일삼고 박정희를 연상케하는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독재자적 포스가 바로 그것이다. 즉 그는 신자유주의라는 기표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개발주의적 신자유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그는 또한, 개발주의적 신자유주의인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개발주의자이기도 하다. 그의 정체성은 바로 이 두 가지 '사이'에 있다.

기표가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의의 찌끄러기를 우리는 잉여라고 부른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드러난 반MB주의자들은 이명박의 '사이'라는 위치 때문에 그가 포괄하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조갑제 같은 수꼴들은 '한나라당이 더 이상 우리를 대변해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박정희 찬양자인 그는 이명박의 개발주의에서 '신자유주의'를 떼버려야 속이 시원하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개발주의적 정체성을 비판한다. 유시민이 김문수의 GTX 건설 사업에 대해 '그거 다 개발주의 사고방식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통상적인 의미에서, 노무현이야말로 가장 실용적인 정권이다. 그야말로 지지자들과 집권 세력, 즉 표상되는 것과 현상 그 자체 사이의 분열을 제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면서 연설에서는 복지와 평등을 강조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명령하면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 노빠들은 그것을 '착한 노무현'이 겪어야 했을 '빌어먹을 현실'이라 강조하며 미화하고 승화한다. 노무현을 추모하는 대부분의 분위기 역시 '대통령 노무현은 잘못했지만 인간 노무현은 추모할 만하다.'라는 분열증을 보인다. 이런점에서 노무현이야말로 이념에 신경쓰지 않은. 지지자들에 신경쓰지 않은 '실용적' 정권이었다.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했다!

그렇기에 이런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노무현은 인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책적으로 좋았다, 면서 다시 과거를 추억하는 노빠들의 시도는 억지로 보일 수밖에 없다. 분열된 현실을 억지로 봉합하려고 하는 것이다. 노무현은 안 그랬지만 이명박은 그랬다, 가 대표적인 시도이다.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은 전혀 봉합되지 않은 채 기표들의 차이 연쇄만 넘쳐난다. 즉 노무현이 좋은 놈이었다고 말하기 위해, '지지자들의 기대를 저버린 노무현'이라는 주제는 전혀 다루지 않은 채, '이명박과 다른 노무현'이라는 차이만 부각되면서 그 분열이 봉합된다는 착각을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노무현은 민주화 세력, 혹은 자유주의 세력과 - 완전하진 않지만- 등치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는 노무현을 이런 식으로 추모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노무현의 죽음에 질질 짰던 이유는 노무현이라는 기표가 담지 못하는 기의의 찌끄레기, 즉 '희망적 정치인'이라는 '나의 노무현'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우선 더 이상 '노무현'이라는 기표가 표현해 줄 수 없는 기의를 대변해 줄 다른 기표를 찾아야겠다. 그 사람에 대한 희망이 곧 내가 노무현을 추모하는 이유이겠다. 그리고 두 번째,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이라는 이 고질적 문제 자체를 해결해야겠다. 대통령 잘 갈아치워서, 정당 하나 잘 골라서 나의 기표가 나의 기의를 잘 대변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집어치우는 방식으로 '노무현을 추모'하려 한다. 아직 죽지 않은 노무현의 유령마저도 진짜 죽이고 나는 노무현을 다시 추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죽여버려야 할 '기표 그 자체'에 대한 추모이다. 인식론은 물론 정치 영역에서도 이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자 운명이라면,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