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5

 


정신분석 입문

저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출판사
돋을새김 | 2009-11-06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인간 본성과 지성의 고결함에 던지의 의문 핵심적인 내용으로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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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

 

1) 정신분석과 정신의학

 

제3부는 신경증 현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이 담겨 있다. 신경증 환자의 증상에는 일정한 동기, 의미, 의도 그리고 특정한 심리적 연관성이 있으며, 이 증상은 심리적 과정을 알려준다. 이러한 증상을 보이는 개인은 이 과정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한 사례를 보자. 한 부인은 남편의 외도를 알리는 편지 한 장을 읽고 질투심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질투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다. 증상은 이처럼 환자 자신의 주관적 고통과 연관 되지만, 객관적으로는 그 가족의 생활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정신의학이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증상이다.

 

앞에서 설명한 부인이 남편을 의심하는 근거는 편지 한 장뿐인데,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편지 한 장으로 질투심을 표출하는 행위가 근거 없는 짓이라는 사실은 당사자인 부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질투를 정당화하면서 괴로워했다. 논리나 현실에 근거한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이런 유형의 관념을 일반적으로 ‘망상’이라 부른다. 이처럼 망상이 ‘현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온 것이고, 이 망상은 왜 하필 ‘질투 망상’인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정신의학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런 기질, 유전적 원인을 제기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질투’ 망상인가? 그리고 기질 때문이라면, 환자의 정신적 체험과는 상관없이 언젠가는 망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말해줄 수 있다. 그녀는 하녀에게 남편이 바람을 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도록 부추겼다. 그녀는 정신분석 과정에서 특별하게 해석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들을 말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어떤 젊은이에게 무척 끌렸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정신적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위 메커니즘을 택했고 이로 인해 질투 망상이 불러일으켜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석 작업을 통해 프로이트는 세 가지 결과를 끌어낸다. 첫째, 망상은 무의미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의미와 충분한 동기를 가진 것이다. 둘째, 망상은 무의식적 정신 과정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 즉 환자 자신이 소망하던 것에 대한 일종의 위안이다. 셋째, 환자의 체험에 근거하여 분석하여 이 망상은 ‘질투’ 망상이 되었다.

 

2) 증상의 의미

 

신경증 증상은 실수 행위나 꿈과 같은 특성을 가지는 동시에, 환자 자신들이 겪어온 삶과 관련된다. 신경증 질환의 종류에는 강박증과 히스테리가 있다. 강박 신경증 환자는 흥미가 없는 데도 어떤 생각에 몰두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중요한 문제로 착각한다. 강박증 환자는 강박관념을 제거할 수 없으며, 모든 증상들을 본래의 모습과는 다르게 바꾸고 미룰 수 있다. 정신의학은 강박증 환자들을 그저 퇴화된 사람들이라고 강조하여, 마치 전혀 다른 사람들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특이한 강박 증상들도 다른 고통과 마찬가지로 제거될 수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강박증 환자의 증상은 환자의 체험과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정신 분석가는 의미 없거나 목적 없는 행위를 설명해 주는 과거의 상황을 발견해야 한다.

 

이처럼 개인적인 증상들은 체험과의 관계를 통해 그 의미를 밝힐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을 규명하기엔 정신분석의 기술이 부족하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꿈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꿈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며 개인적으로도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전형적이라고 부를 만한 꿈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아직 그 꿈이 왜 단조로우며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나는지는 아직 밝히지 못했다.

 

3) 외상성 고착 - 무의식

 

신경증 환자는 병적 증상을 보이며 과거의 특정 시기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특정 시기에는 어린 시절, 심지어 유아기도 포함된다. 이러한 행태는 전쟁 때문에 발병하는 외상성 신경증과 유사하다. 전쟁이나 생명을 위협하는 끔찍한 사건을 겪은 이들은 병적 증상을 보인다. 외상성 신경증은 외상을 가져온 사고 순간에 ‘고착’된다. 강박 신경증자 역시 과거의 어떠한 경험으로부터 기반하여 특정 행동을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중요한 것은 이 때 환자는 자신의 행위가 과거의 체험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르고 있는데도’ 행동한다는 이 지점에서 ‘무의식적 심리과정’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브로이어와 프로이트는 ‘환자의 마음속에는 증상의 의미를 숨기고 있는 명확한 무의식적 과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 과정을 의식으로 끌어내면 증상은 사라진다. 이것을 통해 정확한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환자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자신의 정신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신경증에 걸린다.

 

4) 저항과 억압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신경증을 연구하면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 언급한다. 의사가 환자를 고통스러운 증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려 할 때, 환자는 치료 과정 내내 강하고 집요하게 저항한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를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의사는 환자가 연상한 내용 중 일부만 선택하거나 빠뜨리지 않도록 분명히 말해두고, 치료의 성공 여부는 환자 자신이 기본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그럼에도 환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숨기려 한다. 환자가 어느 정도 의사에게 순응하고 나면, 환자의 저항은 논리를 바탕으로 한 지적인 형태로 바뀐다.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난점들이나 불확실한 문제를 부각시켜 의사와 논쟁을 벌이거나, 자신의 논리를 의사가 반박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반드시 ‘나타나야만’ 한다. 만약 충분한 저항이 없거나 환자 자신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치료가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 저항을 극복하는 것이 분석의 본질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환자의 저항을 통해 나타난 병인적 과정을 억압이라 부른다. 먼저 충동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목표를 추구하는 심리적 과정을 충동이라 한다. 항상 충동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충동을 포기한다. 그리고 이 포기의 과정에서는 충동 때문에 발생했던 에너지가 빠져나감으로써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충동이 억압될 때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억압받은 충동은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충동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개념은 무의식이다. 모든 정신과정은 무의식적 단계에서 의식적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모든 무의식적 과정이 의식적인 것으로 바뀔 필요는 없다. 무의식의 조직은 커다란 대기실 같아서, 그곳에는 각각의 심리적 충동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이 대기실 옆의 방이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이 두 방 사이의 문턱에는 문지기가 있어, 이 문지기가 개별적인 충동들을 걸러내고 검열하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이 충동들이 문턱까지 도달했지만 문지기에 의해 제지되었다면 그것들을 의식할 수는 없다. 이를 ‘억압되었다’고 한다. 문지기가 들여보낸 충동들도 반드시 의식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번째 방은 전의식이기 때문이다.

 

5) 인간의 성생활

 

학문의 영역에서의 성은 일상생활에서 받아들이는 개념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성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성생활에서 성별의 차이를 무시한다. 이들은 동성애자 이거나 성도착증자이다. 성도착자들은 대상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적만을 놓고 본다면 정상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 외에 비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성행위는 정상적인 사람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식과 많이 다르다.

 

첫 번째 집단에 속하는 이들에게는 상대방 신체의 다른 기관이 성기의 역할을 한다. 예컨대 입과 항문이다. 두 번째 집단의 사람들은 성적 기능이 아닌 다른 기능 때문에 성 기관에 집착한다. 예컨대 배설 기능이다. 여성의 유방이나 발, 땋아 내린 머리 등에 성욕을 느끼기도 한다. 신체 기관으로 성욕을 채우지 못하는 페티시즘도 다른 예이다. 시간증도 대표적이다. 두 번째 집단의 극단은 정상인에게는 단지 성행위의 준비 단계에 해당하는 것들을 성욕의 목표로 삼는 도착증자이다. 이성을 바라보거나 만지고만 싶어 하는 이들, 관음증자나 노출증자가 그들이다. 혹은 마조히스트나 사디스트도 있다. 결국 이들 각 집단에 속하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성적 만족을 현실에서 찾으려는 사람들과, 어떤 현실적 대상도 필요치 않고 쾌락 자체를 공상으로 대체함으로써 단지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이반 블로흐는 도착증을 퇴화의 징후로 보는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성도착 행위들은 원시 종족이든 고도의 문화 민족이든 관계없이 모든 시대에 걸쳐 나타나며, 그 사회에서 묵인되거나 널리 통용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앞에서 신경증 증상은 성적 만족의 대체물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 만족에는 도착적인 성욕까지 포함시켜야 한다. 모든 신경증 환자들은 동성애적 충동을 보이며, 많은 신경증자들은 잠재적 도착증의 형태로 표출된다. 예컨대 편집증은 강렬한 동성애적 충동들을 억압하려는 시도 때문에 발생한다. 히스테리 환자들에게는 성 기관을 신체의 다른 기관들로 대체하려는 도착적 충동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성생활을 연구하는 데 있어 그 대상으로 어린이도 포함해야 한다. 증상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검토한 기억들과 연상들이 대체로 유아기에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아의 성생활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리비도’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리비도는 본능이 드러내는 힘이다. 리비도는 성적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다. 배가 부른데도 계속 젖을 빠는 유아의 행동에 주목해보자. 유아는 빠는 행위 자체에서 만족감을 얻는다. 여기서 입과 입술은 성감대이다. 유아는 성감대를 혀나 엄지손가락으로 대체하고, 자위행위로 대체한다. 이처럼 유아기의 성은 자기 성애적 양상을 보인다. 즉 성적 대상을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이다. 배설 행위에서 성적 만족을 느끼는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사회적 품위와 관습에 의해 이러한 쾌락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6) 리비도의 발달과 성적 조직

 

성생활, 리비도 기능은 어떠한 완성된 형태가 아니다. 여러 번 모습을 바꾸며 단계별로 발달해 나간다. 발달 과정의 전환점에서 모든 성적인 부분 충동들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생식기가 최우선이 된다. 이리하여 성의 역할을 생식 기능에 종속된다.

 

부분적인 성 충동들과 그 대상의 관계의 측면에서 이러한 발달 과정을 설명해보자. 성적 충동의 구순기에 관계하는 대상은 어머니의 젖이다. 그러나 점차 그 대상은 자기 신체의 한 부분으로 대체된다. 항문기에 들어서서, 자기 성애적 충동으로 바뀐다. 이후의 발달 과정은 두 가지 목표를 지닌다. 첫째, 자가 성애적인 단계를 벗어나는 것, 즉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대상을 다시 외부의 대상과 바꾸는 것이다. 둘째, 개별적인 충동의 서로 다른 대상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유일한 대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 인간의 최초의 사랑의 대상, 성적 만족의 대상은 어머니라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여기서 등장한다.

 

신경증에 걸린 성인들에 눈을 돌려보자. 정신분석학은 모든 신경증자들이 자신이 한 때 오이디푸스였거나, 콤플렉스에 의해 햄릿과 같은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개개의 인간은 부모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며,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어머니를 향한 리비도적 욕망에서 벗어나 그 욕망을 현실적인 다른 대상을 선택하는 데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신경증 환자들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리비도를 다른 성적 대상에 쏟을 수가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신경증의 핵심적인 요인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7) 발달과 퇴행 이론 - 병인론

 

리비도의 발달 과정은 신경증 발생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리비도의 발달 과정은 두 가지 위험, 즉 억제와 퇴행을 불러 온다. 모든 개별적인 성충동은 충동의 다른 부분들이 최종 목표에 이르는 동안, 일부분이 성적 발달 과정의 초기 단계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를 고착이라 한다. 퇴행이란 지금까지 발전해왔던 요소를 초기 단계로 되돌려놓는 것을 말한다. 충동의 역할은 목표에 도달하여 만족을 얻는 것인데, 충동이 외부의 거센 장애물들에 부딪히면, 퇴행의 동기가 된다. 발달 과정에서 고착이 강해질수록 충동의 기능은 과거에 집착했던 지점까지 퇴행함으로써 외부의 난관을 피하려 한다.

 

퇴행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한 가지는 근친상간적인 성격으로, 맨 처음 리비도가 지향했던 대상에게로 퇴행하는 경우이다. 다른 한 가지는 성의 모든 체계가 과거의 단계로 퇴행하는 경우이다. 퇴행과 억압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억압은 전의식 체계에 속해 있는, 의식할 수 있는 행위를 무의식 속에 밀어 넣음으로써 무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억압은 성과는 관련이 없고, 순수한 심리적 과정이다.

 

사람들이 신경증에 걸리는 이유는 자신의 리비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를 좌절이라 부른다. 그리고 신경증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이 바로 좌절된 만족감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경증은 외부적 요인 때문인가, 아니면 내부적 요인 때문인가? 혹은 특정한 기질 때문에 어차피 발병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특히 마음에 상처를 준 외상적인 체험 때문에 발병하는가? 특히 신경증들은 리비도 고착과 그 밖의 다른 성적 기질 때문에 발생하는가 아니면 좌절에 의한 스트레스 때문인가?

 

신경증의 원인을 고려할 때 이처럼 성적 기질과 체험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이는 리비도 고착과 좌절로 표현해도 좋다. 신경증의 원인에는 이 두 가지 말고 또 한 가지가 있다. 이 세 번째는 자아의 발달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이다. 이 갈등 때문에 리비도적인 본능들이 거부된다.

 

8) 증상 발전

 

우리는 신경증 증상들이 리비도를 새로운 방법으로 충족시키려 할 때 생겨나는 심리적 갈등의 결과임을 알고 있다. 대립하고 있는 두 힘은 증상 발전이라는 타협을 통해 화해한다. 현실에서 거부당한 불만족스러운 리비도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방법을 찾는다. 성도착인가, 신경증인가? 이 같은 퇴행이 자아의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신경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리비도는 현실적인 만족에 도달한다. 그러나 자아가 반발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자아는 리비도의 고착에 맞서 억압을 통해 자신을 보호한다. 그렇다면 리비도가 억압을 뚫고 나가기 위해 필요한 고착은 어디서 찾아내는가? 유아기의 성생활이나 그 당시의 성적 체험들이 그것이다. 도식으로 정리하자면, 신경증의 원인 = 리비도 고착에 의한 기질(성적 기질+유아기의 체험) + 우연한 체험(외상적 도식) 신경증 환자들은 자신의 과거에서 어느 특정한 시기에 고착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리비도가 만족을 누렸던 시기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증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이 꼭 진실은 아니다. 거짓이자, 사실이다. 이러한 환상들은 심리적 실재이다. 신경증 환자들이 증언하는 유년기는 부모의 성교를 목격한 것, 성인들에게 받은 성적인 유혹, 거세의 위협 등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암시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상상에 의해 보완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환상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인간의 자아는 외부 세계의 영향으로 서서히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따르도록 교육받는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잠정적으로 혹은 영원히 포기해야만 한다. 따라서 보상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쾌락을 포기하지 않고, 현실 원칙에서 벗어난 보호 구역을 남겨둔다. 이것이 환상이라는 심리의 영역이다. 프로이트가 여기서 언급한 신경증은 히스테리 환자의 증상 발전에만 해당한다.

 

9) 일반적인 신경 질환

 

자아의 거짓된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자아는 신경증이 발생하고 지속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증상은 억압하는 자아의 속성을 만족시키는데, 이는 증상에 의해 자아가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내적인 작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신경증은 세 가지, 신경쇠약, 불안 신경증, 심기증으로 구분된다. 모든 증상들은 리비도 때문에 발생하며 결국 증상들은 리비도를 비정상적으로 사용하는 데서 오는 대리 만족이다. 그러나 실제 신경증의 증상인 두통, 고통을 수반하는 감각, 특정 기관의 흥분 등은 그 어떤 심리적 의미도 없다. 그 증상들은 주로 신체에만 나타나며 이는 물리적 과정이다.

 

10) 공포와 불안

 

불안이라는 감정은 인생 초기에 겪는 특별한 체험과 관련이 있다. 출산 체험이 그것이다. 출생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고통, 분만 당시의 자극들이 통합되는데, 이는 불안의 원인이자 최초의 지독한 불안이다. 즉 인간은 엄마에게서 분리될 때 처음으로 불안을 느낀다.

 

이제 신경증적 불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러한 불안은 ‘기대 불안’이다. 이를 느끼는 사람들은 모든 가능성들 중에서 항상 가장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고, 모든 우연을 불길한 조짐으로 해석한다. 이를 불안 신경증이라 부를 수 있다. 불안의 두 번째 요소는 심리적인 요인과 관련 있으며, 특정한 대상 및 상황들과 관련된다. 공포증이다. 공포증의 대상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이 갖는 보편적인 공포심이다.(뱀 등) 두 번째는 위험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언제나 불안해하지는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상황 공포증이 이에 속한다.(배의 침몰, 다리 붕괴) 세 번째는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 세 번째 유형은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이 경우 불안과 위협적인 위험 사이의 연관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경증적 불안은 왜 생기는 것일까? 첫째, 기대불안이나 일반적인 불안은 성생활의 특정 과정과 깊이 관련이 있다. 성적 자극이 충분히 배출되지 못하고 성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등 욕구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불안이 나타난다. 리비도적 자극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불안이 자리 잡는다. 두 번째, 불안은 종종 증상들과 함께 나타난다. 어떤 정상적인 정신 과정이 빠져버리고 그 자리가 불안에 의해서 대체된다. 셋째, 강박 행위로 힘들어하는 환자들은 불안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강박 행위로 불안을 감추고, 단지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 강박 행위를 한다. 나타났어야 할 불안이 어떤 증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아와 리비도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불안에 대해 정의할 수 있다. 불안은 자아가 위험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며, 도피를 준비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11) 전이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은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고 무의식을 의식으로 해석해내는 일이다. 이를 통해 억압과 함께 증상이 나타나는 조건들을 없앨 수 있으며, 병인이 되는 갈등 역시 해결할 수 있는 정상적인 갈등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억압을 없애야 한다. 우선, 억압을 들추어내어 환자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억압과 이에 대한 리비도의 반격은 무의식이 아니라 자아에서 벌어지므로, 무의식이 아니라 자아에서 이 억압을 깨뜨려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치료 과정에서 특이한 현상이 하나 발생한다. 히스테리 환자들과 강박증자들이 의사에게 아주 특이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환자는 의사에 관한 이야기만 한다. 환자는 새로운 심리학적 사실들을 수용하며 만족해하고, 마침내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환자는 마치 자신이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행동한다. 이는 환자가 강렬하고 애정 어린 감정들을 의사에게 전이시킴으로써 장애가 발생한 것이다. 의사는 이 전이를 효과적인 치료 수단으로 활용하여, 정신 활동의 잠긴 부분을 여는데 기여하게 만들어야 한다.

 

12) 분석 요법

 

정신분석의 치료 과정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모든 리비도가 증상에서 벗어나 전이를 향해 집중된다. 두 번째 단계는 이 새로운 대상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이며, 리비도는 이 대상에서 놓여난다. 우리는 전이 과정에서 리비도의 한 부분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김으로써 자아를 벗어난 리비도 전체를 집결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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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5

 


통치론

저자
존 로크 지음
출판사
까치 | 2007-06-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로크의 통치론을 우리말로 옮긴 책. 통치론은 시기를 달리하여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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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로 작성한 날림 글이지만 올려둡니다.


같은 사회계약론자로 분류되지만, 홉스와 로크의 차이는 매우 명확하다.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주권/최고권을 어떻게 상정하고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홉스는 주권이 단일성/지속성을 가져야 한다는 장 보댕의 주장을 계승한다. 보댕은 정치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종교내란과 같은 형태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분쟁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힘을 모두 제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주권을 상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권이 단일성과 지속성을 가져야만 정치적 결정이 단일하게 그리고 권위를 가지고 작동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보댕은 군주 1인이 주권자가 되어야 주권의 단일성과 지속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보댕의 생각은 당대의 절대군주정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이론적인 영향을 주었다.


홉스는 보댕처럼 절대군주정의 정당화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혁명을 통해 새롭게 수립된 정치공동체, 크롬웰의 공화정에 “어떻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서 시작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홉스는 자연 상태의 만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위적 인격이자 주권자인 ‘코멘웰스’에게 양도함으로써 사회 상태에 들어선다는 사회계약론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양도’된 주권이 단일하고, 지속성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은 보댕과 다르지 않았다.


로크는 이 지점에서 보댕과도. 그리고 홉스와도 단절한다. 로크와 홉스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로크가 상정한 정치사회에서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근대국가에서 주권 개념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장 보댕은 주권이 절대왕정의 군주에게 있다고 말했다. 홉스는 자연 상태가 아닌 사회 상태에서 주권은 인위적 인격이자 주권자인 코멘웰스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댕과 홉스가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는데 반해, 로크는 그렇지 않다. 그는 사실상 최고권력/주권을 다수로 상정한다. 그는 홉스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던 ‘임기’나 ‘선출’과 같은 개념을 통해 주권의 지속성에 타격을 가하는데 이어, 다수의 최고권력/주권을 상정함으로써 주권의 단일성에도 (일정 부분) 타격을 가하는 셈이다.


로크는 제일 먼저, 정치사회의 최고 권력을 입법권에 부여한다. 몇 가지 제한이 있지만, “입법권은 모든 국가에서 최고의 권력이다.”(128) 로크가 국가 내에서 입법권이 최고 권력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정치사회의 수립에 관한 그의 논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연 상태에서도 인간을 자유로우며, 천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그들이 가진 권리는 “그 향유가 매우 불확실하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침해할 위험에 놓여”(119) 있다. 향유가 불확실한 권리의 대표적인 사례는 재산이다. 따라서 인간은 “비록 자유롭지만 두려움과 지속적인 위험으로 가득 찬 이 상황을 기꺼이 떠나고자”(119)하며, “생명, 자유, 자산의 상호보존을 위해서 사회를 결성할 것을 추구하거나 기꺼이 사회에 가입하려고”(119) 한다.


이처럼 사회 상태에서 인간이 자연 상태와 달리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자연 상태에서는 없는 것들이 사회 상태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법률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분쟁을 해결하는 공통된 척도로서 공통의 동의를 통해서 수용되고 인정된 법률 그리고 확립되고 안정된, 잘 알려진 법률이 없다.”(120) 즉 사람들이 사회에 들어가는 가장 커다란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사회에는 법률이 있기 때문이고, 이를 근거로 입법권은 한 정부의 최고 권력으로 기능한다.


로크는 입법권이 최고 권력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입법권이 행정권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이는 이론적으로 주권의 단일성을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로크 나름의 노력일 것이다. 집행권을 지닌 집행부는 입법권을 지닌 입법부의 승인과 허가 하에서만 자신의 권력을 발휘할 수 있다. 입법부가 법률로 지정한 내용에 따라서만 집행부의 집행권을 발동한다. 이는 입법부가 법률과 규칙이 위반된 경우 “집행권을 부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44) 따라서, “행정권(집행권)은 입법권에 분명히 종속되고 책임을 져야하며, 또한 입법부의 뜻에 따라 변경되고 해임된다.”(145)
그러나 로크는 혼란스럽게도, 집행부가 최고 권력을 행사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이는 대권과 연합권의 존재 때문이다. 대권이란 법에 의해 사회의 모든 것이 규율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행정권을 가진 자의 재량(의 권력)이다. 이 대권은 두 가지를 근거로 정당화되는데, 첫 째는 입법자의 한계이고, 두 번째는 법의 경직성이다. 먼저 입법자는 미래에 사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법을 ‘불충분’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법의 불충분성을 채우기 위해 집행부의 대권이 인정된다. 또한 법이 모든 것을 세세하게 규정할 수 없고, 제정 의도와 달라질 수 있다는 ‘법의 경직성’ 때문에, 집행부의 대권이 인정된다.


대외적으로 존재하는 집행부의 재량은 연합권이다. 이는 하나의 정치사회가 그 정치사회 밖의 모든 단체, 사람과 마주할 때 발생한다. 전쟁 같은 이러한 상황은 언제 터질지 모르고 사안이 매우 급박하다.(정치공동체의 존폐와 관계되므로)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권한은 ‘상시적’ 권력인 집행권에 부여되며, 이 권리를 ‘연합권’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연합권은 어떻게 집행부로 하여금 최고 권력을 행사하도록 하는가? “국가 내에서 구성원들은 사회의 법률에 의해서 지배된다. 그러나 여타 인류에 대해서 그들은 하나의 단체를 구성하며. 그 단체는 이전에 구성원들이 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타 인류에 대해서는 자연 상태에 놓여 있다.”(140) 즉 국가 밖의 모든 사람 및 공동체와 마주하는 순간, 전쟁과 강화, 연맹과 동맹, 교섭을 하는 순간 그 공동체의 법률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따라서 집행부는 입법부가 제정하는 법률에 일정 부분 자율성을 누리며 연합권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로크는 입법부가 집행부보다 우월하다고 말했지만, 실제적인 힘(집행력)을 지닌 집행부가 입법부를 무시한다면, 실질적으로 입법부가 집행부를 제어할 방법은 없다. 이런 점에서 로크는 대놓고 집행부에게 최고 권력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주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로크는 역시 최고 권력을 ‘인민’에게 부여하기도 했다. 통치론 곳곳에서는 입법권과 집행권에 제약을 가하는 조건들이 등장한다. 공공선이라든가, 인민의 복지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입법부는 자의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공포해서 안 되며, 인민의 복지를 위해서만 법률을 제정하고 공포해야한다. 또한 인민의 동의 없이 그들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해서는 안 되며, 법률을 제정할 권력을 그 밖의 다른 사람/기관에게 이전하거나 인민이 그 권력을 설정한 곳 이외의 다른 곳으로 설정해서도 안 된다. “입법부는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활동할 수 있는 단지 신탁된 권력이므로 입법부가 그들에게 맡겨진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이 발견될 때 입법부를 폐지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최고 권력은 여전히 인민에게 있다.”(155)


또한 로크는 인민에게 집행부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경우 이들을 인민이 힘으로 제압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실제적인 집행력을 지닌 집행부가 입법부를 무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로크는 인민의 힘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가의 힘을 장악하고 있는 행정권이 입법부가 소집과 활동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148) “인민은 그들의 권력을 행사하여 그들의 입법부를 본래대로 회복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148)


이렇게 최고 권력이 다수의 곳에 놓여 있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다수의 최고 권력이 존재하면, 정치공동체가 과연 안전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헤, 우리는 로크에게 ‘안전’과 ‘평화’란 무엇인지 상기해야 한다. 홉스와 비교해보자. 홉스가 설명한 대로라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생명을 위협받고 늘 전쟁 상태에 시달린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안전과 평화를 보장받기 못하기 때문에, 주권자에게 권리를 양도하며 사회 상태로 들어선다. 반면에 로크에게 자연 상태란 불안정한 상태일 뿐이다. 자유와 권리가 있으나, 그것을 ‘확실히’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가 자연 상태이다. 이를 보장받기 위해 인간은 사회 상태에 들어선다. 즉 로크에게 ‘안전’이란 내 재산과 생명과 자유가 보장받는 상태이며, 평화 역시 그러한 상태이다. 정치공동체를 이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만일 사회 상태에서 그 ‘목적’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누군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자연 상태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 처하게”(132) 된다. 자연 상태에서 인민들에겐 자신의 권리를 방어할 자유와 힘이라도 있다. 그러나 사회 상태에서는 강한 권력을 지닌 권력자들이 탄생해버렸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인민 개개인은 자신을 방어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로크는 권력을 분립하여 권력의 자의적이고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 행사를 방지하고, 또 제한하고자 했던 것이다. 행정권과 입법권의 분리는 이 때문이다. 또한 이를 어길 경우 인민이 기존의 정치사회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내 재산과 자유와 생명이, 즉 안전과 평화가 보장받지 못한다면 굳이 왜 이 정치사회에 남아 있어야 하는가?


따라서 다수의 최고 권력으로 인해 정치공동체가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기 어렵지 않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로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최고 권력을 한 곳에 두는(홉스 식처럼) 방식으로는 정치공동체가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는 정치공동체는 인민의 손에 해체되어 마땅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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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4

 


라깡의 재탄생

저자
김상환외 엮음 지음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 2002-05-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번역에 의존하던 기존의 라깡 정신분석학 연구의 흐름에서 벗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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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재탄생>에서 서동욱 교수가 쓴 "라깡과 들뢰즈 -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와 라깡의 부분 충동 : 스피노자적 욕망이론의 라깡 해석"을 요약한 것임.

 

라캉과 들뢰즈

 

1. 그토록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라캉의 공식초상화와 전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라캉에게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을 통한 근친상간 금지는 아이의 욕망을 좌절시키고 결여된 욕망을 본성으로 하는 주체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들뢰즈는 근친상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열중한 것은 라캉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기표를 비판하는 일이었다. “기표는 문자의 시대에 거대한 전제군주의 기호이며, 그것이 물러나면 일정한 관계로 분해될 수 있는 넓은 해변만이 남는다. 이러한 가정은 기표의 압제적이고 폭력적이고 거세적인 성격을 해명해준다.” 더 나아가, 라캉 정신분석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인 분열된 주체 -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 간의 분열 - 역시 들뢰즈에겐 비판대상이다. 언표의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의 분열 속에서 욕망을 파악하는 것은 욕망을 주체 개념의 여러 요소(인격성, 성별 등등)들을 통해 이해하려는 인격주의적 해석인 반면 들뢰즈는 인격주의적 해석의 체제 순응적 면모를 밝히고 이로부터 욕망을 해방시켜 그것의 비인격적 혹은 비인물성을 드러내려 했다.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라캉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 들뢰즈가 상징계와 상상계를 허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실재계만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이 빚의 무게는 실재에 접근하기 위한 라캉의 장치들(대상 a, 부분 충동)과 들뢰즈의 핵심개념들을 대질시킴으로써 가늠할 수 있다. 들뢰즈가 제기한 실재계만으로 구성된 욕망이론이란 유기체적 통일을 이루지 않는 분리된 다수의 부분적 욕망들, 인격성을 형성하지 않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다. 이 욕망이론은 스피노자의 개념을 원용한 것으로, 한마디로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스피노자의 개념틀을 통해 해석된 라캉의 실재계라 할 수 있다.

2. 라캉의 충동이론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는 라캉의 ‘부분 충동’에 관한 이론에 크게 힘입어 성립되었다. 우리는 들뢰즈와 라캉을 비교할 때 ‘욕망’이라는 단어에 속아 들뢰즈의 욕망과 라캉의 욕망을 비교해선 안된다. 들뢰즈의 욕망과 라캉의 충동을 비교해야 한다.

충동이란 무엇인가? 충동은 실재계에 대한 중요한 이론적 접근 방식 중 하나로, 라캉의 충동 개념은 어떤 항상적인 힘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라캉이 성적 충동들이 결코 통일적 하나를 이룰 수 없는 여러 조각의 ‘부분’ 충동들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그것과 다르다. 구순충동으로부터 항문충동으로 이행하는 어떤 자연적 변형이 없듯이 하나의 부분 충동과 다른 부분 충동 사이에는 어떤 생성 관계도 없다. 즉 충동들은 오로지 파편적인 부분일 뿐 전체로 통합되는 유기체가 아니다. 충동들이 실질적으로 구별되며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는 라캉의 생각은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의 가장 중요한 본성과 일치한다.

라캉의 충동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충동의 원천, 대상, 목적, 그것이 만족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각각의 충동에는 원천으로서의 기관이 상응하는 데, 그것이 성감대이다. 네 가지 성감대와 이에 상응하는 네 가지 충동이 있다. ‘입(입술)-구순충동, 항문-항문충동, 눈-시각적 충동, 귀-청각적 충동.’ 그리고 이 충동들에 대응하는 대상이 바로 대상 a라 불리는 ‘젖가슴, 배설물, 시선, 목소리’이다. 이 대상 a는 부분 충동에 대응하는 파편적 조각이므로 부분 대상이라 불린다. 다음으로 충동의 목적이란 기관의 즐거움이며 타자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신체로부터 만족을 얻는 자기성애의 형식을 띤다. 음식을 섭취하며 욕구가 만족되는 배고픔과 달리(만족이 대상으로부터 온다.) 구순충동은 입 혹은 입술이라는 기관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왜 니코틴에 대한 욕구가 없어도 담배를 피는가? 즉 충동의 원천은 기관이므로 충동은 기관에서 출발해 우선 대상 a를 향해서 발사되지만, 대상 a는 충동이 진정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즐거움의 원천은 기관 자체이므로 충동은 대상 a의 주위를 돌아 다시 기관으로 되돌아간다. 하나의 기관은 충동이 등록되어 있는 원천이자 충동의 운동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왜 사람들은 연예인의 사진이나 종교적 아이콘에 키스를 하는가?

이 충동의 ‘목표’와 ‘목적’은 다르다. 충동의 목표는 자신의 원천인 기관 자체이지만 그 기관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 충동의 목적은 아니며, 목적은 성감대에서 출발해 다시 성감대로 되돌아오는 순환적 여정을 계속 생산해내는 것, 이를 통해 만족을 얻는 것이다. 활쏘기에서 당신이 명중시킨 새는 목표이지만,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명중시킴으로써 점수를 얻은 것이다. 충동은 이 활쏘기에서의 화살과 같다. 그것이 겨냥하는 목표물과 점수를 얻기 위해 활쏘기라는 도정을 계속하는 것(목적)은 다르다.

이 충동의 메커니즘은 욕망의 메커니즘과 다르다. 그 둘 모두에게 대상 a는 결여이지만, 충동과 욕망에게 결여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 대상 a는 상징계 안에서 욕망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지만 상징계 안에서 (들뢰즈의 표현대로) 오직 빈집, 빈 선반, 빈 단어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욕망은 이 대상 a의 모방 밖에 얻을 수 없으며 이 모방, 기표를 다른 기표로 바꾸는 덧없는 여행을 계속할 뿐이다. 실재계는 고정되어 있고 이 실재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의 방황에 의해 상징계의 대체물들이 자리바꿈을 되풀이한다. 이 쉼 없는 방황을 대상 a가 일으킨다는 점에서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다. 그러나 충동은 이와 달리, 그 목적이 대상 a가 아니며 대상 a로부터 만족을 얻지도 않는다. 충동의 목적은 순환운동이며 이 운동으로부터 만족을 얻어지기에, 대상 a는 충동에게 거머쥘 수 없는 어떤 것이긴 하지만 그 원인은 될 수 없다.

3. 결여로서의 욕망과 생산으로서의 욕망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와 라캉의 부분 충동 사이의 유사성은 충동과 욕망의 비교를 통해 드러난다. 들뢰즈는 욕망을 불만으로, 결핍으로 정의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다. 결여로서의 욕망은 잃어버린 것의 획득이라는 플라톤의 상기론의 변주이며 목적론이라는 신화에 의존하는 욕망의 신학화라는 것이다. 절대자는 부정의 형태 속에서만 현상계에 나타나며, 현상계의 모든 존재자들의 욕망은 이 절대적 초월자를 향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목적론적이다. 이 부정신학적인 초월의 운동은 라캉의 욕망 개념과도 매우 유사하다. 대상 a는 부재하는 빈집을 통해서만 부정적으로 출현하고, 부정적 매개만을 반복하는 욕망의 영원한 운동은 대상 a에 의해 궁극적으로 인도를 받는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라캉의 충동 개념은 들뢰즈가 내세운 ‘생산으로서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생산으로의 욕망은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하며 스피노자의 힘 개념이 그 원형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의 힘은 신의 본질 자체이며 이 본질이 만물을 생산하는데, 이 본질이 바로 속성들이다. 즉 신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되는 한에서 사물의 진정한 원인이다. 스피노자의 속성이 생산하는 욕망 개념의 철학사적 원천이며 곧 ‘욕망하는 기계’와 동치이다. 스피노자 말고 라캉 역시 들뢰즈에게 영감을 주었다. 라캉의 충동은 끊임없는 순환운동을 목적으로 하여 그로부터 만족을 얻는다. 즉 충동의 유일한 목적은 그 자신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의 속성, 라캉의 충동, 들뢰즈의 욕망기계는 모두 생산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며 그 생산은 자기 원인이 되는 것,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라캉의 충동 개념을 이해하면 들뢰즈가 왜 ‘기계’라는 단어를 사용해 욕망을 지칭했는지 알 수 있다. 기계는 목적론에 맞서기 위한 개념이다. 욕망과 달리 충동의 운동은 원인도 목적도 없이 기계적이다.

4. 욕망하는 기계와 기관들 없는 신체

들뢰즈는 라캉의 충동이 지닌 비유기체적인 부분적 성격, 파편성을 스피노자의 구별이론을 통해 이해한다. 부분 충동들,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성은 서로 간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으며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통합되지 않는 ‘속성’들 간의 구별에 대응한다. 그렇다면 이 요소들은 어떻게 종합하는가? “관련성의 부재는 이들 전체의 정합적 결합의 특별한 힘을 구성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직접적 관련성이 없다는 점은 그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신적 실체에 속한다는 것을 보증한다고 말한다. 무한한 속성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며 반대관계도 모순관계도 없기에 신에게만 귀속 가능하다. 부분 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도 마찬가지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실체 자체요. 부분 대상들은 실체의 속성들, 즉 궁극적 요소들이다.” 그는 욕망하는 기계를 속성과, 기관 없는 신체를 실체와 동일시한다. 스피노자에게서 각각의 속성들 사이에는 ‘비관계’만이 있다. 이접적인 속성들이 유일실체에 귀속되는 것처럼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에 귀속된다.

들뢰즈에 의하면 기관들 없는 신체란 욕망의 생산의 모든 과정이 등록되는 표면이다. 이는 칸트와 스피노자가 신이라 부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신은 개별자들에 귀속할 수 있는 모든 술어들의 총체적 저장창고이며 스피노자에게도 모든 속성의 총체가 신이다. 들뢰즈는 칸트의 이론을 사용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를 설명하는 동시에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기관들 없는 신체에 대한 가장 위대한 책이라 말한다. 즉 기관들 없는 신체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이자 칸트적 의미에서 실재의 총체이다.

이처럼 기관들 없는 신체는 욕망하는 기계에 대해 독립된 지위를 가지는 존재자도, 경험상에 현시될 수 있는 표상도 아니다. 오직 서로 이접적인 모든 욕망하는 기계들의 총체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그들 자체를 통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를 생산한다.”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힘을 리비도라고 부르고 이것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기관들 없는 신체를 구성했을 때 그 힘을 신적인 힘, 누멘이라 부른다. 칸트에게서 만물은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소재를 이 실재의 총체로부터 가져온다는 점에서 이 총체가 신이라 불릴 만하듯이 개별자가 잠재적으로 지닐 수 있는 모든 소재에 해당하는 욕망하는 기계들 전부가 귀속되어 있는 총체라는 점에서 기관들 없는 신적이며 그것의 에너지도 신적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와 라캉의 욕망이론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들뢰즈와 라캉이 사용하는 ‘알의 메타포’를 비교해야한다. 들뢰즈는 기관들이 유기체화되기 이전의, 층들이 형성되기 이전인 알이 기관들 없는 신체라고 말한다. 라캉은 알의 메타포를 통해 부분 충동들의 발생을 설명한다. 자궁 속에서 빠져 나온 갓난아기는 껍질 밖으로 흘러나온 알(깨어진 알, 라멜르)과 같은데, 이 때 자궁에서 갈라져 나온 아기가 택한 생존방식은 분열이다. 아기의 신체는 유기체를 이루지 않은 채 여러 개로 분열된 아메바들이 제각기 기어 다니는 하나의 대지와도 같다. 이 분열된 각각의 아메바들이 기관을 중심으로 고착된 것이 부분충동이다. 순수한 생존본능에 지배되어 있는 라멜르가 성감대에 자신을 고착시키는 순간이 바로 부분 충동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충동이 그 주위를 맴도는 대상 a는 자궁 밖으로 빠져 나온 라멜르가 자신의 신체적 보완물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가질 때 이 보완물의 등가물로 자리잡는 것이다. 기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라멜르와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다. 라캉의 알 메타포에서 라멜르의 세상 첫 경험은 신체부분(자궁)의 상실이라는 ‘결여’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라캉의 메타포는 상실된 통일성에 대한 신화적 가설에 의존한다.

그러나 라멜르가 부분 충동의 형태로 기관들에 고착되면 그것의 운동방식은 더 이상 어떤 결여의 신화와도 관계가 없어진다. 대상 a는 그 기원이 무엇이든 충동들에 대해 결여로도, 원인으로도, 목적으로도 작용하지 않는다. 목적은 끊임없는 생산이다. 이 생산은 욕망하는 기계들의 경우와 똑같다. 또한 아기의 신체 안에서 부분충동들 서로 간의 이접성은 기관 없는 신체에서 욕망하는 기계들 간의 이접성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들뢰즈는 한 신체 안의 성감대의 분포를 기관들 없는 신체의 상태와 동일시한다. 제각기 쏘다니는 부분 충동들과 그들 각각의 전진기지인 기관들은 유목민의 캠프처럼 신체 위에 흩어져 있다.

5. 독신기계 - 부분적 주체이론

속성(욕망기계)과 실체(기관 없는 신체)에 이어, 양태에 해당하는 개별자들, ‘주체’의 발생해보자. 이 주체는 어떤 의미에서 부분 충동들 각각이다. 부분 충동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반성적 구조, 자기동일성을 스스로 산출하는 구조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성 구조는 성감대에서 출발해 다시 그 성감대로 되돌아오는 순육체적 층위에만 머무른다는 점에서 ‘나’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 완전한 주체화가 아니라 주체 개념 없는 주체화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욕망 자체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현실적 개별성을 지닌 존재자로서의 주체, 욕망하는 기계들로부터 파생되는 개체로서의 주체이다.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들, 부분 충동들의 종합으로 생성된다. 들뢰즈는 이 종합을 ‘소비의 연접적 종합’이라고 표현했다. 욕망하는 기계들이 주체의 발생에 사용된다는 의미에서 소비이고,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이 서로 결합해서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를 낳는다는 뜻에서 연접적 종합이다. 이는 스피노자적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이해 가능한데, 스피노자에게선 서로 이접적인 속성들의 종합 위에서 양태로서 인간 개체가 존립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라는 양태로 이루어진 인간 개체는 서로 이접적인 속성, 사유와 연장의 연접 속에서 생산된다. 속성들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으며, 인과관계는 오직 실체와 양태 사이라는 종단적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주체는 이 상이한 속성들,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을 횡단하는 과정이자 흐름이다. 즉 주체란 그 안에 욕망하는 기계들이 강림해서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떠나가곤 하는 투명한 껍데기에 불과하기에, 주체는 분열증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동일성을 가진 어떤 고정된 주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 분열증적 주채에 독신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의 에너지는 볼룹타스(즐거움)인데, 이는 욕망하는 기계의 힘인 리비도와 기관들 없는 신체의 힘인 누멘의 변형이다. 마치 스피노자가 인간의 힘을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힘의 일부분, 신 또는 자연의 본질의 일부분이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독신기계의 에너지가 즐거움이라는 것은 이것이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임상적 의미의 정신분열자(환자)와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을 구별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병원의 정신분열환자는 무엇인가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인 반면, 혁명가는 탈기호화와 탈영토화 과정이라는 정신분열적 과정을 거친 사람이다. 정신병자는 자기 안에서 이질적인 다수의 부분충동을 제한없이 작동시키는 작업이 좌절된 사람이다. 이 좌절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기표라는 억압적 기제를 통해 다수의 비인격적 욕망하는 기계들의 흐름을 가족주의적 도식 속의 ‘한 인물’의 욕망으로 고정시켜버리는 데서 일어난다. 고로 주체의 자유란 수많은 상태들을 횡단하는 일을 방해받지 않고 계속 실현하고 이를 통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기계의 종류


경제 형태


힘의 변용


종합의 형식


스피노자의 해당 개념


비고


욕망하는 기계


생산


리비도


연결

(connexion)


속성


라캉의

부분충동


기관들 없는

신체


등록


누멘


이접

(disjonction)


실체


칸트의

실재의 총체


독신기계


소비


볼룹타스


연접

(conjonction)


양태


분열증적 주체,

부분적 주체


이 들뢰즈의 주체 이론은 라캉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주체에 대한 고정된 위치도 자기 동일성도 거부한 들뢰즈의 주체, 즉 부모도 배우자도 없는 ‘독신’기계와 상징계 속에서 오이디푸스화한 주체가 어떤 점에서 관련이 있는가? 들뢰즈는 라캉이 오이디푸스적으로 해석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자, 즉 라캉을 오이디푸스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곳에서 분열증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라캉에게 있어서 기표는 인간의 존재조건이다. 인간이 기표에, 즉 대타자의 질서에 순응할 때 한 사회체제 속에서 허락된 욕망이, 다시 말해 인간 주체가 탄생한다. 기표의 질서 속에서 어린아이의 자기 성애적 단계, 실재계에 속하는 대상 a와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충동은 소외되어버린다. 상징계는 사물의 살해이며 이 살해는 주체 안에서 욕망의 영원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상징계 안에서 실재계의 대상들과 부분 충동들이 억압된 형태가 바로 욕망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라캉의 사상이다.

들뢰즈는 반면에 라캉이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바는 오이디푸스와 기표를 비판하고 그 이면에 은폐된 “욕망의 실재계적인 비유기체성”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아버지 기표를 욕망을 규정짓는 보편적 조건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단계에서만 출현하는 정치적, 경제적 지배도구로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들뢰즈는 이런 관점에서 기표의 기원을 전제군주제에서 발견한다. 아카드 문자의 고전적 유래에 따르면 문자 혹은 기표는 주인민족과 노예민족의 만남이라는 전제군주제의 산물로, 노예민족 쪽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고 주인의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 노예들이 자신의 새로운 알파벳을 만드는 조건이다. 문자는 사회적 합의 같은 게 아니라 권력의 산물, 전제군주적 경제체제와 제도의 산물이다. 어린 아이는 본성상 아카드인 같은 문맹자이다. 무의식을 결정하는 기표는 무의식이 이미 전제 군주적으로 지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라캉의 작업은 인간 개념의 구성 요소, 즉 기표의 전제 군주적 성격 일반을 비판하는 작업인 동시에 이 무의식의 기표적 구조화가 언어학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해 구조주의 언어학 자체가 전제 군주적 체제의 도구임을 밝혀내는 계보학적 작업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인간의 욕망은 ‘욕망의 욕망’ 혹은 ‘대타자(기표)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정식은 이렇게 변형된다. “욕망은 욕망의 욕망, 전제군주의 욕망[에 대한]의 욕망이 된다.”

오이디푸스적 주체가 전제 군주적 지배의 산물이라면, 라캉에게서 진정한 주체는 무엇인가? 들뢰즈에 의하면 바로 독신기계이다. 중심은 기계가 차지하고, 주체는 가장자리에 있으며 주체는 자기가 지나가는 상태들로부터 끌어내진다. 우연히 나타나는 서로 이접적 상태들의 결합으로 그때그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끊임없는 운동의 부산물이다. 기계들이 주체의 부분들로 유기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기계에 의해 생산된 결과이다. 들뢰즈는 라캉의 텍스트를 통해 이런 사실을 발견하지만, 이 해석은 자의적 측면이 강하다. 이 인용은 프로이트의 자아분열과 관련하여 결여로부터 탄생한 주체라는 들뢰즈의 주체 개념과 정반대되는 주체 개념에 대한 논의의 일부로 씌여졌기 때문이다.

6. 결론 : 욕망과 혁명 - 결국 들뢰즈와 라캉의 차이는......

그러나 들뢰즈에 의해 해석된 라캉과 라캉 정신분석학 그 자체엔 아무런 차이도 없는가? 라캉은 상징계, 아버지의 이름, 기표를 고작 패배하기 위해 만든 것인가? 라캉과 들뢰즈의 차이점은 우선 결연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근친상간의 금지가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다른 부족에게서 여자를 구하는 것이 욕망들 간의, 부족들 간의 결연을 가능케 한다고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 결연을 다른 의미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욕망을 인물들의 욕망으로 이해하는 이상, 혼인을 욕망들 사이의 결연의 불가결한 형태로 이해하는 이상 결연을 비오이디푸스적으로 설명할 방도는 없다. 욕망을 비인물적인 부분 충동의 층위에서 이해할 때만 해법을 도출할 수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개체는 서로 통합되지 않은 이접적인 여러 개의 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부분 충동들, 부분 대상들, 욕망하는 기계들이다. 이 개체 안에서 다수의 충동은 성의 횡단이란 방식으로 공존하는데, 개체 안의 다수의 성끼리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며 이들은 다른 개체의 부분 충동들과만 소통할 수 있다. 한 남자의 수컷 부분은 한 여자의 암컷 부분과도, 한 여자의 수컷 부분과도, 다른 남자의 암컷 부분과도, 다른 남자의 수컷 부분과도 소통할 수 있다.

이런 소통이 바로 욕망하는 기계들의 종합의 형식인 연결이며, 이 연결엔 결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욕망은 어머니의 결여를 메우기 위한 대용품으로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 일을 겪지 않는다. 욕망이 한 인물의 성욕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는 일, 욕망이 남자와 여자라는 인물의 형태로 움직이는 일은 오이디푸스적 조작 이후에나 일어난다. 오이디푸스로부터 생겨난 인물 차원에서 성들 간의 연결은 어머니를 배제하고 그 결여를 메우기 위해 다른 여자와 혼인한다는, 배제와 결여의 논리를 따를 수 밖에 없다. 들뢰즈는 상징계적 인물을 매게로 한 이러한 연결에 반대하여 실재계 차원의 비인격적 부분 충동들의 연결을 내세운다. 실재계 안에는 어떤 인물 형태의 성욕이나 성별은 없다. 결국 들뢰즈 욕망이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각자에게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인간적이지 않은 성을 돌려주는 것, 그의 여러 성을 돌려주는 것이다. 반면에 오이디푸스 개념을 이용해 혼인관계의 질서를 규명하고자 했던 라캉은 인물과 인물을 지배하는 상징계적 법칙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들뢰즈와 라캉의 또 다른 차이점은 대상 a가 나타나는 방식, 실재와 만나는 방식에 있다. 들뢰즈는 한 개체의 부분 충동이 연결되고자 하는 대상이 다른 개체의 부분 충동이기에 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을 동일한 뜻으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이해는 그가 실재계의 부분 대상을 부분 충동이 정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라캉에게 충동의 운동은 대상 a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자기 성애적 형태를 띤다. 즉 대상 a와 맞닥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이 ‘실재로’ 연결될 수 있다고 이해하는 데, 이는 실재계와의 직접적인 만남이 가능하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지젝은 실재의 응답이라는 표현을 통해 실재계가 환영의 형태로 등장한다고 주장하는데, 들뢰즈는 이런 식으로 환영을 통해 실재계와 만나는 것을 비판한다. 부분 대상과의 연결, 실재와의 만남은 실재로 일어나는 사건이지 환영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은 실재계 안에서 정말로 이루어지는 대상 a와의 만남을 ‘주관적인’ 환상의 영역으로 변질시켜버렸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이러한 차이로, 들뢰즈와 라캉은 혁명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인다. “욕망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함으로써 비자발적으로 혁명적이다.”(들뢰즈) 들뢰즈는 1) 의도적으로 혁명을 추구하는 것, 즉 새로운 사회적 개체를 추진하는 원인들과 목적들의 질서 속에서 자기들의 활동을 하는 혁명과 2) 갑자기 돌출해 원인들 및 목적들과 관계를 끊고 사회적 개체를 다른 국면으로 되돌리는 욕망에 의한 혁명을 구별한다. 원인과 목적들의 질서에 기반한 표상으로서의 혁명에는 늘 자본주의화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 자본주의는 혁명조차 자신의 공리계에 추가하여 스스로의 경계를 넓혀간다. 파시스트 연대장이 마오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 더불어, 혁명세력의 오이디푸스화 역시 매우 위험하다. 혁명집단은 자본주의적 지배체제와 동일하게 부성적 주체집단과 그 밑의 예속집단으로 변질된다. 동구권 혁명세력의 관료화처럼 말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혁명의 가능성을 혁명의 표상을 추구하는 집단에서가 아니라 욕망(부분 충동)의 본성에서 발견한다. 부분 충동으로서의 욕망은 무목적적이지만, 자본주의가 “자본씨, 대지부인, 이 둘의 아이 노동자”라는 오이디푸스적 구조를 통해 지배하려는 데 반해 욕망은 본질적으로 오이디푸스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 욕망이 자기의 본성에 충실한 이상 욕망의 본성에 대립적인 체제인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욕망의 본성은 어떠하기에 그 자체로 혁명적인가? 욕망은 실재계의 부분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에 상징계에 대해서 혁명적이다. 억압적인 모든 상징계적 장치를 넘어 실재계의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에 혁명적이다. 여기서 욕망은 상징계적 매개를 거치지 않은, 실재와 직접 연결되려 하는, 어떤 목적론적, 신학적, 변증법적 함의도 지니지 않는다. 이 기계의 본성에 어긋나는 모든 상부구조, 상징계, 이데올로기 등은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스피노자의 힘 개념을 빌려온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힘은 권력에 대립한다. 네그리에 의하면 스피노자 철학은 매개라는 비열한 게임에 굴복하지 않는데, 여기서 매개란 힘으로서의 생산력을 자기 아래 종속시키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말한다. 이 매개는 들뢰즈에게 오이디푸스라는 복종의 장치이기도 하다.

라캉 역시 대상 a로부터 기존의 구조적 질서를 붕괴시키는 혁명의 힘을 목격한다. 그럼에도 그는 들뢰즈처럼 욕망이 승화 같은 매개나 변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실재계와 조우함으로써 혁명이 달성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1968년 5월에 대해 “구조는 거리로 나가지 않는다고 쓰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일 5월 사건이 증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구조가 거리로 나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구조를 옹호하는 라캉에 반대하며 들뢰즈에 가타리는 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68년의 사건은 상상계적이지도 상징계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실재계의 침입이었다.” 부분 충동이 실재와 조우하면서 생긴 사건이었다. 인간이라는 단위에 선행하는 분자적 차원, 비인물적 욕망들의 해방에서부터 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어떤 형태가 됐건 이욕망들을 가두는 ‘구조’를 변호하려는 입장과 양립할 수 없다.

이처럼 라캉과 들뢰즈의 관계는 일면적이지 않고 수많은 모순된 차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양립 불가능한 주장들의 싸움터가 있는 반면에 들뢰즈에겐 자신들의 개념을 경작하는 터전인 라캉의 밭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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