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2:5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출판사
국일미디어 | 1998-02-2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세기에서 1차대전이 끝난 20세기 초반까지 3세대에 걸쳐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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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읽었다. 11권 짜리 책을,
프랑스인들도 어려워서 못 읽는다는 책을
그것도 번역본으로 읽고자 집어들었고
이건 도저히 1주일에 한 권 이상 못 읽겠다고 욕심부리지 않고
3달만에 다 읽어낸 대작이었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김용규 씨가 쓴『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라는 책을 읽다가, 평소에 문학 어지간히 안 읽는 (다치바나 다카시와는 다른 이유로) 나지만, 그래도 기본은 읽어야된다는 생각에 나름 유명한 문학들은 접한 지라 김용규 씨의 책에서 해설해논 문학들은 다 읽은 거였다. 하나 빼고. 그 하나가 바로 프루스트의 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였다.

두 번째는 문학적 편식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고 싶어서 인데, 나는 음악도 차이코프스키와 드보르작 밖에는 안듣고, 도스도예프스키를 문학의 신으로 받들고 톨스토이의 소박한 매력을 좋아하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닥터 지바고』를 복음서처럼 생각하는, 러시아음악-문학(거기다 미술의 원근법마저 러시아식을 서구의 그것보다 훨씬 좋아하는)의 찬양자이다.(내가 평할 정도로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서구 작가는 헤르만 헤세 뿐인지라, 프랑스 문학을 접할 계기는 전혀 없었다. (크리스티앙 자크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제외하고. 여기선 클래식을 의미하니까.) 그래서 프랑스 문학의 걸작 중 하나인 프루스트를 집어들었다.

세 번째는 프루스트 개인의 삶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호기심이다. 소설가로서 그저 그렇던 어느 날 문을 걸어잠그고 잠수탄 끝에 탄생시킨 하나의 작품. 그리고 좀 있다 죽어버린 한 작가. 그렇기에 한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태어났다고까지 평가받는 작가. 이런 사람의 온 모든 열정이 담긴 책을 읽는다는 건 여전히, 한 때 작가를 진지하게 꿈꾸었던,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설이 길었는데, 이런 계기와 결심이 없었더라면 가볍게 읽지 못할 정도의 대작이었다. 원어로는 20쪽 짜리의 한 문장이 이어진다는 긴 호흡의 문장은 물론이거니와 의식의 흐름을 따라 펼쳐지는 연상작용 방식의 서술은 독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듯하다. 이런 어려운 책을 계속 놓치않고 3달 간이나 잡은 이유는 이 책에 그 만한 매력이 흘렀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독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자면, 철저히 작가, 더 자세히 말하면 주인공인 마르셀 중심으로 서술된다는 것이다. 문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의식의 흐름 기법이다. 호메로스가 뮤즈의 입을 빌려 말한 것처럼 대서사시도 아니고 작가가 앞으로 나아가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성장소설도 아니다. 프루스트는 "회상"이라는, 가장 개인적인 방식, 가장 사적 영역의 침투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도 부족하다. 그 역시 과거-현재-미래라는 연속적 시간의 흐름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마르셀은 연속적 시간에서 벗어나고자 가장 사적인 공간인 침대에 뛰어들고, 이제 공간의 영역마저도 벗어나고자 "회상"을 시작한다. 자신밖에 침투할 수 없는 아무도 들어설 수 없는 공간인 기억. 그 기억을 더듬어가며 펼쳐지는 오디세이는 마르셀이 아닌 독자에게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만들고 있다. 근대적 시간관을 비판하는 발터 벤야민이 프루스트를 언급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간적 형식의 파괴는 프루스트가 방문을 걸어잠그고 세상과 단절된 채 소설을 써나갔다는 점과도 일치한다. 그는 개인적 공간에 침투함으로서 자신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과의 "단절"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의 매력이라고 지적하는 두 번째 지점이기도 한, 사회에 대한 인식은 계속 이 책에서 드러나고 있다. 당시 타락한 살롱 문화에 대한 비꼬기와 연애문화의 가식성에 대한 프루스트의 조소는 마르셀의 이름을 빌려 책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정치적 견해와 반드레퓌스파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이 책을 단지 소설로만 끝나게 하지 않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이런 사회적 인식을 통해 그가 개인적 공간의 침투를 시도하긴 했으나 그것이 세상과의 단절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프루스트가 시도한 것은 단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자신을 철저히 주인공으로 만드는 채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각이었다. 이는 근대적 시간관의 파괴와도 관련된다.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방식으로 연속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회상과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고 떠올려진다. 이 얼마나 포스트모더니즘적인가! 나는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생각보다 글이 좀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꼭 권하고 싶다. 이 책은 그냥 대작이 아니라, 탈근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러나 여전히 근대적인 우리에게 하나의 메세지를 던지는 소설이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세세한 내용보다는 전체적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 더 멋진 소설. 프루스트는 아마도 일부러 소설을 길게 늘여쓰면서 이렇게 생각하진 않았을까 싶다. "소설은 내가 쓰지만 이걸 다 읽진 마세요. 아니, 알아서 읽어보세요."라고 말이다. "쓰여지지 않는 것을 읽는 것이 독서다."(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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