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35

1학년 1학기 글쓰기 과제. 주제와 입장이 정해져 있어서 이렇게 썼을 뿐이다. 난 내가 써놓고도 이 글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지난 2월, 평화재건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 다산부대에서 통역병 활동을 하던 윤장호 병장이 테러 공격으로 사망하면서,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한국군이 파병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더욱이 최근 정부가 발표한 레바논 파병과도 관련되어 파병 논란이 뜨겁다. 이에 대해 파병과 관련된 찬반 양론을 소개하고, 이와 관련되어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파병에 반대하는 논리 중 하나는 한국군 파병이 전쟁으로 희생된 국가의 평화와 재건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피지배자들에 대한 억압의 역할만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다산부대의 현지 근로자들에게 ‘보석을 사오지 않으면 총으로 쏴버리겠다’고 협박한 한 간부의 이야기[1]는 그런 논리를 뒷받침해준다. 또한 피지배자를 억압하는 체제 속에서 한국 군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이다. 반면에 파병 찬성 측에서는 반대측의 이런 논리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다산부대에서 간부가 근로자를 협박하는 것과 같은 광경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며, 엄격한 규율 아래 현지인들과 대립이나 갈등 없이 생활한다는 것이다. 또한 다산부대는 주임무인 시설 보수에 초점을 맞춰 활동하고 있으며, 의료 목적인 동의 부대도 아프간의 재건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2] 즉 피지배자에 대한 억압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군율이 엄하지 않아 발생하는 총기 사고, 피지배자에 대한 권력 남용 등은 파병 반대 논리로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상회할 만큼 한국군 파병에는 큰 의의와 목적이 있다. 바로 인도주의적 목적이다. 한국군이 ‘위험’하다고 철수하자는 논리는 파병의 가장 큰 목적인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모든 나라들이 ‘위험’하기 때문에 철수하면, 미국의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지역들의 재건은 어려워진다. 종족간, 종교간 갈등으로 테러가 난무하고 치안은 엉망이 될 것이다. 경제적 이득은 부차적으로 얻어지는 것일뿐더러 경제적 이득이 없다 할지라도 미국의 패권 전쟁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구호는 국제적 연대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병이 아닌 비전투병, 특히 의료나 시설 보수 등의 재건,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파병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파병이 당위성을 띔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상에서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파병 한국군의 현지인 억압이나 테러로 인해 한국군 장병들이 희생되는 문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현지인 억압의 문제는 제도와 엄격한 군율로 해결할 문제이고, 한국군 비전투병의 희생은 안전성 강화의 측면에서 해결해야 할 사항이다. 또한 파병부대 내의 인권침해 가능성과 파병의 실익에 관하여 파병 찬성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는 것[3]이 또 다른 문제이다. 이것은 현 정부나 언론이 경제적 실리, 미국에 대한 의리를 위해 파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파병에 찬성하는 언론, 정부는 찬성 논리의 초점을 경제적 이득이나 국익에서 인도주의로 바꿔야 한다. 더불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의 의리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리를 강조해야 한다. 그래야 파병 지지의 여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윤장호 병장이 사망하고, 한국군이 위험에 처해있는 상황은 매우 안타깝다. 그러나 위험하다는 논리가 곧 한국군 철수로 이어질 수는 없다. 전쟁은 이미 벌어졌고, 문제는 그것을 수습하는 일이다. 그 수습은 국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파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도주의에 초점을 맞춘 파병, 그것이 한국군 파병의 올바른 방향이다.

[1] 강성주,「나를 괴롭힌 건 ‘적’ 아닌 ‘우리’였다」,『한겨레』, 2007. 3. 1
[2] 김영빈,「다산부대의 진실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국민일보』, 2007. 3. 6
[3] 윤보중, 「아프가니스탄에서 평화재건 활동은 자살 행위였다」,『민중의소리』, 2007. 3. 6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34

2학년 2학기 수업 리포트

 

 


오리엔탈리즘

저자
Edward W. Said 지음
출판사
교보문고 | 2007-03-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
가격비교

 

1.
1-1. 아랍의 식민지화는 19세기 중엽 이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학문과 동양을 구제하고 해방하는 ‘사업’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중엽의 다양한 동양학술단체들은 동양문명을 발굴하고 지리적으로 조사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과거의 찬란한 동양문명과 지금의 ‘나쁜 동양’(주로 이슬람, 즉 아랍지역)을 대비하고 동양을 과거의 영화로운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유럽에 의한 ‘사업’을 정당화하였다. 또한 지리적 발전으로 급속도로 늘어난 동양에 관한 기행문학들은 실제로 신비로움이 상실된 동양에 관해 알리고 이를 통해 상실된 동양을 회복하기 위한 유럽의 사업들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업들은 유럽이 19세기 말이 되면서 아랍권 전체를(1918년 이후 유럽에 병합되는 오토만 제국령 제외) 식민화하면서 확고하게 진행되었다. 식민화란 상업, 교통, 통신, 종교, 군사, 문화가 포함된 다양한 이해관계가 확고해지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영국은 아랍을 식민지화하면서 기독교의 강대국으로서 옹호해야할 정당한 (종교적, 혹은 종교 차이로 인해 전쟁으로 대표되는 군사적) 이해관계를 느꼈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보장을 위해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선교단체들은 유럽의 확장과 결합되고 이러한 결합에 무역회사, 학술단체, 지리탐험 기금, 번역 기금, 동양에 건립되는 학교, 영사관, 공장 등이 더해져서 이해관계의 개념이 더욱 폭넓어졌다. 이렇게 확고하고 폭넓어진 이해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유럽은 사업을 확대하였고 이로 인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학문과 동양에 대한 사업이 결합하게 된다.

1-2. 오리엔탈리즘의 역할은 19세기 이후 동양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는 학문적 기능에서 식민지 동양을 지배하는 통치의 기능으로 변화한다. 이는 아프리카와 동양이 유럽을 위한 지적인 구경거리에서 유럽의 특권적인 ‘무대’로 돌변하는, 유럽에 의한 동양과 아프리카(비서양)의 지배가 시작되는 식민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장기간에 걸친 서양의 완만한 식민지화의 과정 아래에서 유럽의 동양에 관한 인식은 텍스트 의존적이고 관조적인 것에서 행정적, 경제적, 심지어 군사적인 것으로 변모했다. 즉 동양이 관찰의 대상, 연구의 대상에서 실제적으로 통치의 대상으로 변모하면서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단순히 동양에 관해 연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무대’가 되어버린 동양의 효율적인 경영을 위하여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동양을 다스리는 ‘제도’와 결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리엔탈리즘이 적용되는 공간적 범위는 제국의 영역과 정확하게 일치되었으며 유럽이 동양을 침략하면 할수록 오리엔탈리즘은 더욱더 대중적인 신용(지배자 유럽인들의 신용 뿐 아니라 피지배자 동양인들에게마저 오리엔탈리즘이 내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을 얻었다.

1-3. 1차 대전은 총력전 양상으로 펼쳐진 최초의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했고, 그 동원 자원에는 자신들의 지배 대상이던 식민 국가들의 국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리엔탈리스트들에게 더 이상 단순히 동양을 이해하고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통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전쟁 승리를 위한 자원 동원을 위하여, 이제 동양은 행위의 담당자가 되어야하고 동양의 힘은 ‘우리’의 가치, 문명, 이익, 목적에 동원되어야한다. 즉 식민국가인 동양에게 더 이상 너희가 지배받는 대상이 아니라 서양과 함께 지배의 주체이며, 주체와 행위의 담당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라는 요구를 하게 된 것이다. 영국이 인도에게 독립시켜 줄 테니 전쟁에서 영국의 군대로 싸우라고 요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쟁 승리를 위한 총동원으로 인해 동양이 ‘그들(유럽)’의 역사 속에 들어가게 되자 오리엔탈리즘은 ‘위기’를 맞게 된다. 역사의 주체가 된 동양이 유럽의 지배를 부정하고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대부터 시작되어 제3세계(식민지 국가들) 전체를 뒤덮은 독립운동의 결과로 1955년의 반둥회의(아시아아프리카회의) 무렵에는 이미 동양 전역이 서양의 제국, 유럽 열강들의 지배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획득했다. 하지만 사이드에 의하면 동양은 새로운 제국, 미국과 소련의 포진에 직면했고 이 새로운 제국은 오리엔탈리즘을 계속 유지할 가능성이 컸다. 한편 유럽 제국주의의 몰락 이후 오리엔탈리즘은 이 독립한 제3세계 앞에서는 더 이상 수동적이고 숙명적인 종속민족, 동양을 인식할 수 없었으며 정치적으로 무장한 동양과 직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오리엔탈리즘은 현실 변화를 무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동양을 인식하느냐, 아니면 종래의 동양에 관한 재구성 방법을 통하여 새로운 사태를 해석하느냐라는 선택에 직면했다. 제3의 대안적 선택인 오리엔탈리즘의 전면적 폐지는 지극히 소수에 의해서만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2.


청연 (2005)

Blue Swallow 
7.7
감독
윤종찬
출연
장진영, 김주혁, 유민, 나카무라 토오루, 한지민
정보
드라마 | 한국 | 133 분 | 2005-12-29

 

 


화이트 마사이 (2006)

The White Massai 
9.1
감독
헤르민 훈트게르부르스
출연
니나 호스, 재키 이도, 카차 플린트, 안토니오 프레스터, 자넷 리에케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 독일 | 131 분 | 2006-06-15

2-1. 청연에서는 당시 일본인들이 가졌던 오리엔탈리즘이 잘 드러나 있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은 아시아 국가이지만 스스로 자신들을 타자화 하여 동양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조선 식민지배의 도구로서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영화 속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 박경원이 조선 적색단 사건에 휘말려 경찰의 조사를 받는 것에 대해 스키하라 외무대신이 말하는 부분이다. 스키하라는 “조국 어쩌구 할 때부터 알아봤지. 그 때 박경원을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올려놓길 잘했어.”라고 말한다. 박경원이 외무성 초청 여류비행사 만찬회에서 장거리비행에 관한 포부를 밝힐 때 한 조국인 조선부터 방문하겠다는 말 때문에 불순사상 의심자로 감시를 받게 된 것이다.

동양인을 감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이다. 동양은 스스로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서양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보호해주고 대신 다스려 주어야하며 이러한 서양의 지배를 통해 동양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변화할 수 있다. 사이드에 의하면 영국은 식민지 지배 시절 앞에서 언급한 동양 지배 철학으로 무장한 법률, 형법과 일관된 사회 원칙의 확립, 그리고 감독기관의 설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즉 지배대상인 동양에 관한 강한 통제와 감시로 지배를 용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경원이라는 개인이 일본 정부에 의해 감시목록에 오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감시와 통제는 ‘능력을 결여한’ 동양인들이 스스로 통치한다고 나서서 결국 다시 야만으로 회귀하는 비극을 막기 위함이다. 조선을 조국이라 말하고, 조선으로 장거리비행을 한다는 말을 한 박경원을 불순사상 의심자로 규정한 것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감시하고 통제함으로써 식민 지배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화이트마사이에는 유럽이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이 드러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 유럽인 카롤라의 ‘할례’에 대한 시각이다. 할례의식은 15세 이상의 소녀를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마사이족의 전통 풍습이다. 카롤라는 마사이족이 어린 소녀를 할례하려는 모습을 목격하고 리말리안에게 이를 말리라고 말하지만 리말리안은 전통이기 때문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에 카롤라는 “이건 말도 안돼”라며 낙담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또한 베르나르도 신부에게 가서 할례를 한다는 데 애를 잡겠다며 말려야한다고 말한다. 베르나르도 신부 역시 할례가 몇 세기가 된 전통이라고 말하자 카롤라는 그래도 누군가를 바로잡아야한다고 말한다.

카롤라의 생각대로라면 마사이족 전통풍습인 할례는 잔인하고 비합리적이며 비인간적인 행위이며 이러한 전통은 사라져야한다. 당시 유럽은 이미 인권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가치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할례는 개인의 고통을 무시하는 비인간적인 행위였으며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집단, 혹은 전통의 폭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는 “누군가는 바로잡아야하는 것”이며 “누군가”는 바로 백인인 카롤라 자신이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서양, 유럽의 가치를 기준으로 동양(더 크게는 비유럽)의 풍습이나 전통을 유럽에 비해 미개하고 비합리적이며 비정상적인 것들로 규정함으로서 동양을 해방시키고 구제해야할, 근대화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카롤라 역시 자신의 기준대로 할례를 미개하고 끔찍한 전통으로 규정하고 이를 백인이며 전통 마사이족이 아닌 자신이 바로잡아야한다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2-2. 박경원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식민지 일본을 뛰어넘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방식을 택한다. 대표적인 예가 전일본비행선수권대회에 참가하고 결국 우승하는 모습이다. 그녀는 비행대회에서 다치가와 비행학교의 랠리 대표 자리를 기베에게 빼앗기자 엄청나게 괴로워한다. ‘만주, 유럽, 태평양, 세상 끝까지 가는, 세계최고의 여류비행사’가 되는 게 꿈인 그녀가 진짜로 우승할 자신도 있으며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대회였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렇게 좋냐는 한지혁의 물음에 “하늘에 올라가면 조선인 일본인 남자 여자 이런 게 없잖아. 그래서 나는 하늘이 좋아.”라고 말한다. 즉 박경원은 식민지 지배국의 국민, 즉 능력을 결여한 조선인에서 벗어나 일본인들마저 뛰어넘는 최고의 비행사가 되어 자신이 직면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차별과 분류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박경원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일본인들이 당시 조선인들을 바라보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전일본비행선수권대회 마지막 랠리 경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자 수많은 일본인들이 환호하고 함성을 질렀으며, 모든 관심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비행 실력만으로 조선인-일본인의 구분을 뛰어넘은 것이다. 또한 이 비행대회 이후 세계적인 여류 비행사 빅터 브루스의 마중비행 담당자로 선정된 것은 그녀가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비행사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전일본비행선수권대회 마지막 랠리 경기 당시 박경원이 역전을 위해 구름 속에 뛰어들고, 위험을 무릎 쓴 결과 결국 우승하게 되는 모습이 박경원이 추구한 오리엔탈리즘 극복 방식을 상징하여 보여주고 있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구분이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결국 남들보다 더 위험을 무릎 쓴 대가로(더 노력한 대가로) 우승이라는, 일본인들로부터 인정받는 대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한 방식이기도 하다.

화이트마사이에서 오리엔탈리즘 극복을 보여주는 사람은 20년 간 마사이족 마을 바살로이에서 생활한 베르나르도 신부이다. 베르나르도 신부가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는 방식은 ‘이해’가 아니라 ‘방관’에 가깝다. 그는 할례를 말려야한다는 카롤라의 말에 “나는 다른 사람을 돕소, 믿음을 주고 존중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요”, “내가 온지는 20년이지만 할례는 몇 세기가 된거요.”라고 말한다. 또한 이에 카롤라가 누군가는 바로잡아야한다고 주장하자 “원하는 건 확실히 해요. 그것만 하거나 아니면 아예 상관 않거나.”라며 말하며 마사이족과 생활하면서 지켜야할 첫 번째 원칙으로 ‘이곳에 설득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주장한다. 베르나르도에 의하면 그가 마사이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여기 있지도” 못했다. 즉 그는 마사이족, 마사이족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기준대로 동양을 규정하고 재구성하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이해’하고자 한 시도에서 발전된 서구우월주의 점에서 ‘이해’에서 벗어나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베르나르도 신부의 태도는 오리엔탈리즘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2-3. 박경원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려는 노력에 대해 조선인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박경원은 세계최고의 비행사가 되기 위해 (기베가 강조한 바와 같이) ‘여성으로서는 아시아 최초’로 장거리비행을 준비하고 이를 위한 후원회를 준비한다. 그녀는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오사카나 동경 등지에서 후원회를 개최하지만 조선인들은 일본 비행기를 탄다고 매국노라는 반응을 보일 뿐이다. 박경원은 후원회의 미비한 실적에 “조선인들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라며 상심해한다. 박경원이 생각하기에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을 뛰어넘어 일본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조선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조선인들이 보기에 그러한 노력은 민족독립이나 해방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일본 식민지 체제 하의 성공이었으며 매국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카롤라로 하여금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충고를 하지만,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할례를 전통이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카롤라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베르나르도 신부는 장사를 시작한 카롤라에게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눈을 보면 안돼요. 여기선 그러면 안돼요. 오해할 거요.”라고 충고한다. 즉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롤라는 “쳐다봐야 물건을 팔죠.”라고 말하며 이 충고를 무시하고 계속 사람들의 눈을 쳐다보고 결국 리말리안의 오해를 사서 갈등을 겪게 된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고자 카롤라에게 그들의 문화대로 행동하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기준에 따라 이러한 문화를 이해할 수 없는 카롤라는 철저히 그의 이러한 노력을 무시한다.

2-4. 청연의 초, 중반부에서 일본은 어쩌면 기회의 땅으로 보인다. 오리엔탈리즘의 시각대로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 짓는 당시 시대상황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자’는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박경원 역시 일본인들을 뛰어넘는 비행사가 됨으로써 세계 최고의 여류비행사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오리엔탈리즘 극복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다. ‘무능력하고 열등한 조선인’에서 벗어나 ‘뛰어나고 우수한 조선인’에게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1904년 러일 전쟁을 통해 major power로 등극한 일본 역시 이러한 전처를 밟아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했다.

그러나 청연의 후반부로 갈수록 오리엔탈리즘은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스키하라 외무대신은 박경원에게 장거리 비행을 허가해주는 대신 만주 일본군 위문비행과 일장기를 달고 비행하는 것 등 황국신민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한다고 말한다. 즉 박경원은 더 이상 ‘우수한 조선인’이 아니라 ‘우수한 일본인’이다. 즉 조선인으로서 노력하여 우수한 비행사가 된 것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수한 비행사가 된 것이다. 이는 유럽 열강들의 오리엔탈리즘이 인종우월주의로 발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럽이 동양보다 우월한 이유는 유럽이 그들보다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동양 역시 합리적으로 변화한다면 유럽에 뒤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유럽이 동양보다 우월한 이유가 유럽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라면 동양인은 유럽인보다 태어날 때부터 열등한 인종이기 때문에 결코 유럽을 뛰어넘을 수 없다.

화이트마사이의 초반부에서 백인 카롤라는 마사이족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한다. 그녀는 물가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려고 시도하며 리말리안이 가져다 준 염소고기도 먹는 등 마사이족과 함께 생활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오리엔탈리즘을 가진 카롤라는 마사이족에 대한 이유 모를 끌림으로 인해 마사이족과의 생활을 결심하고 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즉 오리엔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 극복이 공존하고 있었다. 스위스로 떠났던 카롤라가 돌아오면서 “여전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난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그녀가 여전히 마사이족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동양을 처음으로 대면했던 유럽인들이 동양의 신비감에 젖어 그들의 문화나 풍습을 문학이나 기행문으로 표현하고, 학술단체를 만들어 동양을 연구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카롤라가 마사이족을 이해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는 순간 공존관계는 깨지고 오리엔탈리즘이 적극적으로 발현된다. 유럽인들이 동양을 ‘이해’하려고 한 순간 오리엔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 극복 간의 공존관계는 깨지고 오리엔탈리즘이 서양우월주의로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카롤라는 남편 리말리안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 리말리안을 이해해야만 했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 자본주의 개념이 없는 마사이족을 이해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쳐다본다는 이유로 애인이 있다고 의심하고 이웃이라는 이유로 물건을 퍼주는 리말리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그녀는 오리엔탈리즘을 발현했다. 유럽의 기준에 따르면 눈을 마주치는 행위는 당연한 것이며,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 방식대로(외상이나 퍼주기를 허용하지 않는) 행동해야했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충고했지만 그녀는 이를 무시하고 자꾸 자신의 기준대로 그들을 바꾸려고 했고 결국 그녀는 마사이족 마을을 떠나게 된다.

3.

내가 오리엔탈리즘을 체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인 교환학생에 대한 나의 생각에서 잘 드러나 있다. 친구가 중국인 교환학생이 버디로 되었다는 말에 나는 별로 좋은 생각을 갖지 않았다. 부럽지도 않았을 뿐더러 친구가 교환학생 때문에 힘들거나 시달릴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더러움’, ‘민주주의나 인권의 가치가 자리 잡지 않은 나라’와 같은 중국에 대한 나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친구의 버디인 중국 교환학생이 티베트 독립을 반대하는 중국 유학생 시위에 나갔을 때도 나는 그를 자기네 민족 밖에 모르고 민주주의 가치를 억압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나는 중국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며 중국인을 만나본 적조차 없다. 나는 중국인들을 철저히 텍스트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왜 그들이 티베트 독립을 반대하는 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가치를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있었다. 반면에 친구가 프랑스인 교환학생의 버디로 선정되자 나는 왠지 모르게 부러웠고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나는 인종적인 차원에서도 철저하게 오리엔탈리즘을 체화하고 있었다.

내가 한 학기동안 영화 속의 국제관계 수업을 들으면서 또 사이드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일반화’의 위험성이었다.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광범위한 의미는 각 개인의 특성을 배제한 채 “이 민족은 이렇다. 이 문화는 이렇다.”고 규정하고 그것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나 역시 이러한 행위에 의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나를 비교해왔다. “일본은 칼의 문화이며 우리는 붓의 문화이다.”라는 식의 대부분의 지역 연구가들이 가진 비교는 일본인 개개인, 한국인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한 채 그들을 일본인, 한국인이라는 틀 안에 환원시켜 일반화하고 이는 결국 무엇이 좋고 나쁘냐는 가치 판단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식민지 지배가 끝났음에도 오리엔탈리즘이 현존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나와 너’의 비교, 그리고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이 흔히 일반 사람들이 자신과는 다른 문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수업을 마치면서 “일반화하지 말자. 이는 위험하다.”라는 굳은 결심을 갖게 되었다.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33

1,2학년때 썼던 보고서들도 여기다 다 올려둔다. 첫째는 보관을 위해서이고 둘째는 얼마나 허접한지 끊임없이 인식하기 위해서이다.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들어가며

우리는 한국의 근대사를 '수난'의 역사라 부르곤 한다. 우리의 근대사에 대한 인식의 대부분을 '일제 침탈'이 장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난의 역사에 대한 강조는 민족적 단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당한 집단적 피해를 강조함으로써 민족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단결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교과서는 민족주의적 시각을 취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연구는 이런 민족주의적 시각을 걷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과 맞섰던 한국 독립운동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이를 통해 근대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고찰이 '수난사의 반복'을 피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한국 독립운동의 문제점

(1) 조선인들의 ‘봉건 사상’에 따른 문제점

근대 한국 독립운동1)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 문제점을 ‘사상(思想)'이라는 코드로 풀어볼 것이다. 먼저 독립운동이 문제점 중 하나는 조선인들이 구국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펼치면서도 ‘봉건 사상’에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개화를 통해 근대화를 주장하고, 근대화를 통해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내려고 했던 조선 지식인층은 철저한 ‘우민관(愚民關)’을 지니고 있었다.

1900년대, 1910년대 혹은 그 이후 조선의 지식인층의 근원은 개화 세력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선진국에서 신 문물을 배워와 조선을 근대화하려 했던 개화 세력들이 조선 지식인층의 원류(原流)인 셈이다. 초기 개화 세력들은 봉건 사상에 사로잡혀 인민을 ‘개화해야 할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는 문제점을 지니게 된다. 이런 문제점은 초기 개화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 1889년 탈고해 1895년 출판)에 잘 드러나 있다.

『서유견문』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위정자(爲政者)의 역할이다. 위정자는 근대 교육을 통해 몽매한 백성들을 깨우쳐야 하며,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덕행을 권장함으로써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 또한 사유재산의 자유에 대해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지나친 자유와 권리 부여 역시 자제해야 한다.2) 유길준이 말하는 ‘인민’은 국권의 확립을 위해 오로지 교육, 통제, 개량되는 ‘대상’에 불과했다.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유길준은 심지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자들의 폭거로 판단하기까지 했다. 그의 동학 농민운동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우민관은 개화 사상가를 비롯한 조선 지식인층에 그대로 전파된다. 유길준으로부터 『독립신문(獨立新聞)』의 발행자금을 받았던 서재필, 그를 조선 지식인의 대부로 추앙했던 1900년대 신문, 잡지의 논객들, 유길준을 흠모해 흥사단(興士團)의 부단장으로 앉힌 안창호 모두 이런 우민관을 답습했던 것이다.

『독립신문』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후하다. 『독립신문』은 한국 초기 모범적인 민족 언론기관의 표상이었다.3) 물론 천부인권을 강조하고 근대적 사고방식의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독립신문』은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조선 지식인 대다수가 빠져있던 우민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 그들은 근대화의 주체를 관(官)으로, 대상을 민(民)으로 설정하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사고방식4)을 답습하고 있었다. 국민에 의한 개혁이 아니라 관에 의한 하향(下向)식 개화를 주장했다.5) 또한『독립신문』은 그 당시 사고방식으로서는 굉장히 개혁적인 ‘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하긴 했지만, 정당의 역할은 법률, 규칙을 만드는 주체였고 백성은 이 법률, 규칙에 복종하고 감시하는 피치자에 불과했다. 즉 백성이 정치에 주체가 될 경우 우민 정치가 펼쳐질 수 있다는 우민관에 입각해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민의 제한참정론(制限參政論)’은 주민의 1.14%만이 선거권을 가진 일본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이는 당시 대다수 성인 남성의 선거권을 인정했던 유럽 선진국가들의 현실과는 대단히 동떨어져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우민관에 입각한 독립운동은 안창호를 비롯한 애국 계몽 운동으로 이어진다. 애국 계몽 운동은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함으로써 독립을 이루려 했는데, 이들의 독립운동은 주체가 객체를 계몽하고 이끈다는 엘리트주의에 입각한 우민관에 사로잡혀있었다. 이들은 일반 민중, 백성들이 주체가 된 무장 독립운동을 비판하고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다. 교육받지 못한 무지몽매한 자들이 일제에 덤벼봤자 당하기만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교육은 실력 양성을 위해 절실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을 품으려 하지 않은 채 민중을 계몽하고 이끌려만 하는 우민관에 입각한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을 민중 전체로 확대하지 못한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한 평등선거권이 전세계적으로 확립된 지는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의 패러다임(paradigm)을 가지고 봉건 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비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모두 인정한다고 해도, 교과서나 기존의 역사서가 독립운동가들의 긍정적이고 개혁적인 면만을 부각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편협한 역사 서술일 것이다. 이런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비판적 관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평가하는 것 역시 긍정적인 면의 서술과 더불어 병행되어야 한다.

(2) 외국에서 건너온 사상,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에 의해 발생한 문제점

조선 내부의 봉건 사상 말고도,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진화론이라는 서구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회진화론은 자연에서의 약육강식이 사회에서도 적용된다는 이론으로서 이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제국주의를 정당화해준다. 또한 제국주의적인 강대국 건설을 위해서 온 국민이 국가를 위해 단결하고 뭉쳐야 하기에 이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을 정당화시켜준다.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한국 독립 운동가들은 위와 같은 두 가지 사상적 경향을 보인다.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은 주로 민족의 자주와 단결,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던 개화 언론들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한성순보(漢城旬報)』는 처음에는 제국주의 침탈을 받는 식민지인들을 동정하는 글을 쓴다. 그러나 개화파들이 『한성순보』를 주도하게 되면서 이 논조는 바뀌게 된다. 아프리카의 식민화를 유럽인이 베푸는 ‘교화’로 보는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한성순보』의 전통을 계승한『한성주보(漢城週報)』의 편집자들은 제국주의 강대국을 선망하는 글을 싣는다. 예컨대 1887년 4월 1일자 기사에서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을 폭도로 몰고, 그들의 강제 이주를 제안하는 모습이 그 예이다.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한 옹호는 『독립신문』6) 에서 극에 달한다. 『독립신문』의 주장을 살펴보자. 『독립신문』은 일본 군인들이 동학농민들을 학살하고, 의병운동을 탄압한 것을 찬양한다. 또한 아프리카의 반제국주의 운동을 진압한 영국군의 수고를 치하하며, 미국이 쿠바, 필리핀의 침략을 위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인 것을 문명화라고 극찬한다. 『독립신문』의 창간자이며 주필인 서재필은 중국 북부에서 러시아의 이권 강탈을 찬양하기까지 한다.7) 그들은 문명국, 즉 강대국이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국을 정벌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한말 가장 급진적이며 민족적이었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마저도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대한매일신보』의 논객들은 제국주의라는 현상을 반인륜적으로 묘사하여 비판하긴 했지만, 권리 경쟁과 생존 경쟁을 우주의 원칙으로 생각했던 점은 다른 개화 언론들과 동일했다. 그들은 식민지 국가들이 제국주의에 침탈 당한 것이 그들 자신의 경쟁력 부족한 것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판단했고, 조선 역시 침탈 당하지 않기 위해 제국주의적 강국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1909년 7월 21일자 <논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강권이 있는 자는 성현이며 군자며 영웅이오, 강권이 없는 자는 용렬한 놈이며 천한 놈이며 소와 말과 개와 돼지다.”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더불어, 사회진화론은 국가주의(國家主義)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근대주의적 계몽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던 개신(改新) 유림들은 개인들이 국가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개신 유림들의 대표 언론이었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장에 잘 드러나있다. 『황성신문』은 천부인권을 강조함과 동시에, 개인의 천부인권 위에 국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있으면 인민이 있고, 국가가 없으면 인민도 없다.”8) 는 논리를 펼쳤던 것이다. 이런 개신 유림들의 국가주의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천부인권설을 주장하는 동시에 인민이 언제나 ‘권리’보다 ‘국법’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 특히 황성신문이 광고하기도 했던 유길준의 저서 『국민수지』(國民須知: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란 뜻; 유길준 말년의 작품으로 1907년에 발간됨)에는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강조한다. 독일이나 일본과 같이 군사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도인 것이다. 유길준과 개신 유림이 지닌 국가주의는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항일 독립운동에까지 그 모습을 보인다. 1909년 12월 22일 젊은 기독교인 이재명은 이완용을 암살하려다가 이완용의 마부인 평민 박원문을 살해하게 되는데, 이재명은 공판에서 단 한번도 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한 적이 없었고10), 독립운동가들도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나라를 위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평민 하나의 죽음쯤은 국가주의에 빠진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별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의 교과서에는 개화 언론들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민중을 계몽했으며 정치 의식을 고양시켰다고만 표현되어있다. 또한 개신 유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구국(救國)과 독립을 위하여 노력한 영웅들로만 평가 받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한 ‘독립’은 단지 독립 그 자체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독립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가 열등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우리도 부국강병과 근대화를 이루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제국주의 열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주류를 이루던 독립운동가들의 궁극적 목표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사회진화론, 우승열패(優勝劣敗)11)의 이론을 비판한다. 더불어 우리 민족을 그런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저항을 한 훌륭한 민족이라 치켜세운다. 하지만 과거 우리 민족들 역시 그 당시 ‘대세’였던 사회진화론의 확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자각해야 한다.

3.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의 의미

흔히 현대의 시각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비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은 그 당시 현실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신중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필자의 연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 모른다. 근대화가 되기 전 조선 사회에서 지식인 층이 정치를 소수의 엘리트가 하는 것이라는 봉건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제국주의 열강에 둘러싸인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그 상황 타파를 위해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넌 세종대왕이 비민주주의자라고 비판할래?’와 같은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 관점으로 과거를 비판하는 것과 더불어 역사를 대할 때 조심해야 될 것이 또 있다. 바로 ‘균형 있게’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 반(反)박정희 운동을 펼쳤던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은 왜 정권에 저항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업적, 긍정적인 면은 사회에 충분히 알려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박정희의 안 좋은 면은 알려지지 않고 있잖아요.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역사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한계점이나 문제점이 있다면 지적해야 한다. 긍정적인 면을 배우는 동시에 부정적인 면은 배우지 않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필자의 연구는 민족주의라는 이유 때문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독립운동사라는 우리의 근대사를 균형 잡히게 만드는 작업이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독립운동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는 시도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1) 앞으로 논의될 모든 독립운동은 을시늑약 이후의 항일 독립운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자주권을 지키려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2) <서유견문>, 「兪吉濬全書」, 일조각, 1971, pp. 118-119.

3) 신용하, 『독립협회연구』, 일조각, 1976.

4)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슈이치, <메이지 일본의 ‘관’과 ‘민’에 대한 의식에 관해서>,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p. 200.

5)『독립신문』, 1896년 8월 27일 국문판 논설; 김숙자, 『大韓帝國期의 救國民權意識』, 국학자료원, 1998, pp. 22-23

6) 아관 파천 이후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손상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재필 등이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게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7) 박노자, 『나를 배반한 역사』, 인물과사상사, 2003, p. 18.

8) 『황성신문』, 1898년 11월 24일 논설.

9) 김봉렬, 『유길준 개화사상의 연구』,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8 , pp. 67-75

10) 박노자,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21』, 통권 655호, 2007, 4월

11) 강한 자(우월한 자)는 흥하고 약한 자(열등한 자)는 패한다, 또한 그것이 자연. 사회의 법칙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이론.

<참고문헌>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한울아카데미), 2007.
김인기, 조왕호,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두리미디어, 2006.
유길준, 『서유견문』, 허경진 역, 서해문집, 2004.
<논설> 제6호, 1883년 12월 20일; 문중섭, 『한말의 서양 정치 사상 수용』,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8, P. 117.
관훈 클럽 편집. 번역, 『한성주보』제3권(1989), P. 923.
『독립신문』, 1898년 4월 14일자 논설.
『독립신문』, 1899년 1월 30일 논설.
『독립신문』, 1896년 11월 12일 논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