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7

 


도덕에 관하여

저자
데이비드 흄 지음
출판사
서광사 | 2008-04-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근대 경험론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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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종종 덕스러운 행동을 한다. 정의로운 행동을 별 부담 없이 하기도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르신들을 보면 자리를 양보하고, 지나가다 거리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으면 주워서 버린다. 하지만 내가 이런 행동을 하고 난 뒤 그는 의문이 있다.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한 걸까?” 칸트라면 나의 이런 행동이 ‘네 마음의 도덕법칙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라면 ‘네가 그렇게 행동해야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칸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과는 달리 매우 단순하다. “나의 정의로운 행동은 자연스러운 본능에 따른 행동일까 아니면 법과 도덕, 사회적 규범 때문일까?” 이에 대해 대답해 줄 수 있는 철학자는 아마 흄일 것이다.


흄에 따르면, 정의는 인위적인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흄은 덕에 대한 감각, 정의가 자연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우리가 누군가가 정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말할 때,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동기’이다. 우리가 칭찬하고 찬동하는 것은 그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산출한 동기이다. 그렇다면 그 동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유덕한 행동,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만드는 독립적 원리가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와 같은 행동을 수행할 역량을 가진 독립적 원리가 인간 본성에 있으며 또 원리의 도덕적 아름다움이 그 행동을 값지도록 한다는 것이다.”(56)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고,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내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면, 나는 왜 그 돈을 갚아야 하는가?


“내가 눈곱만큼이라도 정직하거나 의무감과 책임감을 눈곱만큼이라도 가졌다면 내가 정의를 존중하고 나쁜 행동과 속임수를 싫어한다는 것이 나의 이유로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규율과 교육을 통해 수련 받은 계몽된 상태의 사람에게는 이 대답이 분명히 옳고 충분하다. 그러나 거칠고 더욱 자연스러운 조건의 사람은 이 대답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궤변적이라고 물리칠 것이다.”(56)

물론 사적인 이익이나 평판 때문에 돈을 갚을 수도 있지만, 이는 사적인 이익이나 평판에 관심이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이 관심이 중단되는 경우 돈을 갚을, 정의로운 행동을 할 동기는 사라져버린다.

어떤 이들은 정의로운 행동을 할 동기가 “공공의 이익에 대한 존중”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역시 실제로 그렇지가 않다. “공공의 이익은 인간의 일반성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고 숭고한 동기이며, 정의와 통상적 정직을 갖춘 행동에서 빈번하듯이 사적 이익과 상반된 행동에서 어떤 힘을 가지고 작용한다.”(58)


흄은 이러한 반론을 통해 인간은 ‘인류애’ 같은 정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은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을 사랑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타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념은 매우 제한적이고 편파적이다. 같은 나라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내 가족과 친지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


공공의 이익이나 인류애가 정의로운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없다면, 사적인 자비나 자기 집단의 이익에 대한 존중이 정의로운 행동의 동기가 될 리는 더욱 만무하다. 내가 사정이 급하면 사적인 자비는 금방 사라질 테고, 자기 집단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나에게 손해를 미치는 경우 그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사라질 것이다.


흄은 이러한 논증을 통해 정의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이나 정념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법률 준수의 공정성과 그 가치가 없다면, 우리가 정의의 법칙을 준수할 실질적으로 보편적인 동기를 자연적으로 갖지 않는다.”(61) “정의와 불의에 대한 감각은 자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비록 필연적이라 하더라도 교육 및 사람들의 묵계 등에서 발생한다,”(61)


그런데 흄은 이 대목에서 우리를 헷갈리게 만든다. 덕과 정의가 자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덕의 감각보다 자연스러운 인간 정신의 원리는 결코 없으므로 정의보다 자연스러운 덕은 없다,”


어떻게 정의가 인위적인 동시에 자연적일 수 있을까? 첫 째, 인간의 ‘필요’에 의해 정의는 자연적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사회를 필요로 하며, 그리하여 사회를 ‘발명’한다. “발명이 명백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사유나 반성의 개입 없이 근원적 원리에서 직접적으로 유래된 것과 마찬가지로 발명도 자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할 것 같다.” 이성 간의 자연적 욕망에 의해 남녀는 결합하고, 가족과 혈족이 꾸려진다. 자기 집단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연스러운 정념을 지닌 인간들은 서로 충돌한다, 이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사회를 만들고, 안정적인 삶(예컨대 소유권)을 유지하려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집단에 대해 편파적인 사랑을 한다는 인간의 정념에서 기인하여 사회가 구성되고, 정의의 법칙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정념이 방치되는 것보다 절제를 통해 더욱 만족되는 것이 명백하므로, (중략) 사회를 유지함으로써 우리가 더 많이 소유하게 되는 것은 명백하므로”(72) “정념 자체는 스스로를 억제”(72)한다. 즉 정의의 기원은 인간의 욕구에 비해 부족한 자연 자원,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편파적 사랑(한정된 관용)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자연적인’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인 정념과 욕망에서 ‘인위적인’ 정의가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가 자연스러운 정념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치인들은 사람들을 보다 쉽게 통치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존경과 불의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도록 애쓴다.” 공적인 비난과 칭찬이 정의로운 행동에 가해지면서 사람들은 정의를 내면화한다. 특히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이 될 어린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이러한 정의를 내면화한다. “명예에 대한 소감은 어린이들의 여린 정신에 뿌리 내릴 수 있을 것이고, 또 이 원리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확고부동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리들은 우리 본성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우리 내부적 구조에 가장 깊이 붙박여 있다.”(83)


이 때 우리는 ‘자연적’이라는 말을 희귀하고 비일상적인 것에 반대되는, 일상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가 일상적인 의미로 자연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 어디에나 있다면, 도덕성에 대한 소감도 어디에나 있을 것은 확실하다. 도덕성에 대한 소감이 전혀 없고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찬동이나 혐오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국가와 개인은 세상에 결코 없기 때문이다.”(49)


정리하자면, 흄은 정의의 속성을 인위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것이라 말했다. 정의는 인간 본성에 그

동기를 내재하고 있지 않으며,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는 인위적이다. 하지만 정의가 자연적 욕망과 정념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는 점에서 자연적이다. 또한 한 사회가 그러한 정의감을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교육하고, 그리하여 ‘일상적인’ 도덕성에 대한 소감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자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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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6

 


니코마코스 윤리학

저자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출판사
| 2011-10-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서양 윤리학을 대표하는 고전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대표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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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우다이모니아) 폴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에 대해 대답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하나의 원리를 제시한다. 세계를 설명하는 그의 원리이다. 바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1094a|1|)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목적이란 기능을 의미한다. 의사의 기능은 병을 고치는 것이며. 의사의 행위는 병을 고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병을 고치는 ‘기능’을 잘 수행할수록 ‘탁월성’이 있는 의사라 불리며, ‘덕(아레테)이 있다’고 불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목적과 기능에 걸맞은 선택과 행위를 할 때 그는 ‘좋음’을 추구하고 따른다. 의사가 병을 고치기 위해(목적) 어떤 처방을(행위, 선택) 한다면, 그는 좋음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엔 다양한 존재들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행위와 선택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에 따라 매우 다양한 좋음들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를 통해 선택할 수 있는 모든 좋음들 중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것이 바로 에우다이모니아(잘 삶/행복)이다. 에우다이모니아가 최선의 좋음인 이유는 이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동시에 이 모든 좋음들이 좋음이게끔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다른 좋음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며, 그 자체로 원인이 아니다. 예컨대 명예를 얻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했을 때, “왜 명예를 얻으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돈을 벌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했을 때 “왜 돈을 벌려고 하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에우다이모니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에우다이모니아’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더 이상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질문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이 다른 것 때문에 추구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도 선택되고 그것(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는 것을 단적으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이 이렇게 단적으로 완전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1097a|4|)


다른 말로 하면 에우다이모니아란 ‘자족적’인 것이다. 자족성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에우다이모니아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이미 앞에서 다 언급하긴 했다. 모든 행위는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한다. 또한 행위의 목적이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일반화해보자. 다양한 좋음들을 뛰어넘는 최상의 좋음이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기능‘들’을 뛰어넘는 어떤 기능도 있지 않을까? 바로 ‘인간의’ 기능이다.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다. 식물이나 동물에게 없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란 바로 ‘이성’이다. 인간이 이성을 가진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이다. 그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사유한다는 의미가 첫째,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가 둘째이다.


즉 “인간 고유의 기능이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 혹은 이성이 없지 않은 영혼의 활동”(1098a|14|)을 뜻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 기능을 잘 수행할 때 탁월성이 있다고 말한다. 기타를 치는 연주자는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지만, 기타를 잘 칠수록 그 기타 연주자는 탁월성이 있는 기타 연주자인 것이다. ‘훌륭한’ 인간이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이다. 즉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1098a|15|)


그런데 왜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적인 좋음을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하는가? 탁월성은 ‘품성상태’가 아니라 왜 ‘활동’에서 성립하는 것인가? 간단하다. 품성상태는 그저 ‘상태’일 뿐이지 실현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품성상태는 현존하면서도 아무런 좋음을 성취해내지 않을 수 있는 반면 활동은 그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098a|8|)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개념을 빌리자면, 품성상태는 ‘가능태(잠재태)’일수는 있으나 ‘현실태’는 아니다. 오직 활동만이 ‘현실태’이기 때문에 탁월성은 활동에서 성립가능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탁월성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이야기한 ‘이성을 가진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를 상기해보자. 인간은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뉜다. 비이성적인 부분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공유하는 부분으로, 영양과 성장을 담당한다. 반면 이성적인 부분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인데, 이 역시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과 이성에 설복/저항하는 부분으로(욕구적인 부분) 나뉜다. 이렇게 두 부분이 나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성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탁월성 역시 이 두 가지 차이에 따라 나뉠 수 있다.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지적 탁월성이 관계하는 영역이다. 지혜나 이해력, 실천적 지혜는 지적 탁월성에 해당한다. 이성에 설복/저항하는 부분은 성격적 탁월성이 관계하는 영역이다. 자유인다움, 절제는 성격적 탁월성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가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임을 밝혔다.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최고의 탁월성을 따라야 에우다이모니아에 도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관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조적인 것이야말로 어떤 것을 행위 하는 것보다 더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우다이모니아가 그 자체로 원인이 되는 것처럼, 관조적인 활동만이 그 자체 때문에 사랑 받는다. “관조적인 활동으로부터는 관조한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반면, 실천적 활동으로부터는 행위 자체 외의 무엇인가를 다소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1177b|5|) 따라서 이 관조적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완전한 에우다이모니아이다.


하지만 인간이 관조적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 자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생겨나고, 씨족이 생겨나고 국가가 생겨난다. ‘정치’가 생겨난다.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경제활동이나 인간의 외적 유복함을 채우는 행위는 자족 이상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더 유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족이나 행위는 지나침에 의존하지 않으며"(1197a|9|) "비록 땅과 바다를 다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귀한 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1197a|10|) 유복한 삶은 자족 이상은 필요 없으며, 자족성을 갖추고 관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면, “탁월성에 따라 활동하는 사람의 삶이 행복할 것이니까.”(1197a|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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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6

 


문명 속의 불만(프로이트 전집12)

저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4-02-2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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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책소개
문명, 사회, 종교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이 책은 프로이트가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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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은 본능의 욕구와 문명의 제약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관계를 다루고 있는 논문이다.

1.

종교적 감정의 진정한 원천은 어떤 독특한 느낌에 있다. 이 느낌은 영원에 대한 감각, 망망대해에 대한 느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느낌을 가진 이는 자신을 종교적이라 부를 수 있다. 이 느낌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우리는 ‘이 세상 밖으로 떨어질 수는 없다’, 외부 세계 전체와 결코 풀 수 없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느낌이다. 유일한 문제는 그 느낌이 정확하게 해석되느냐, 그 느낌을 종교적 욕구의 원천이자 기원으로 간주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런 느낌을 정신분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자아는 자율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적어도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뚜렷한 경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병리학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자아의 외부 세계의 경계가 불확실해지거나 실제로 경계선이 부정확하게 그려져 있는 상태를 많이 알게 되었다. 즉 우리 자신의 자아 감각도 얼마든지 혼란에 빠질 수 있고., 자아의 경계도 변함없이 일정한 것은 아니다.

 

어른의 자아 감각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았을 리는 없다. 자아 감각은 여러 단계를 거쳐 발달해 왔다. 유아는 외부 세계와 자아를 아직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차츰 외부 세계와 자아를 구별하는 법을 배우고, 대상을 자아의 맞은편에 놓게 된다. 밖에 있는 외부 세계를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자극은 다양한 고통과 불쾌감이다. 무제한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쾌감 원칙은 이 불가피한 불쾌감을 제거하고 피하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그런 불쾌감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아에서 분리하여 밖으로 던지고, 낯설고 위협적인 밖과 대결하는 순수한 쾌감-자아를 창조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분리에도 불구하고 원초적 자아 감각은 더 범위가 좁고 뚜렷한 경계선을 가진 성숙한 자아 감각과 한 쌍을 이루어 나란히 존재한다.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 나중에 거기서 파생된 것과 나란히 살아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정신 속에서만 가능하다. 정신생활에서 과거의 것은 보존될 수도 있고, 어쨌든 반드시 파괴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망망대해 같은 느낌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어떤 느낌이 에너지의 원천이 되려면, 그 느낌 자체가 강한 욕구의 표현이어야 한다. 따라서 유아기의 무력함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아버지에 대한 동경에서 종교적 욕구가 유래하는 것은 명백하다.

 

2.

 

인생은 너무 많은 고통과 실망과 과제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을 견디기 위해서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종교 뿐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목적과 의도는 무엇인가? 인간은 인생에 무엇을 요구하고, 인생에서 무엇을 성취하기를 바라는가? 답은 행복이다. 인간은 고통과 불쾌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쾌감을 경험하려고 한다. 인생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쾌락 원칙의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의 행복은 극도로 억제되어 있던 욕구가 충족되는 것에서 오고, 이런 일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인간은 오직 대조에서만 강렬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상태에서는 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은 우리 자신의 이러한 심리 구조로 인해 이미 제한되어 있으며, 불행을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체, 외부 세계, 타인들과의 관계로 인해 불행에 처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이겨내기만 해도 이를 다행이라 여기며, 고통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고 쾌락을 얻는 것은 뒷전이며, 이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자발적 고립, 과학기술을 통한 자연(외부세계)의 지배와 통제, 중독 등등. 또 다른 방법은 리비도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것이다. 여기서는 본능적 목표가 외부 세계의 방해를 받을 수 없는 쪽으로 이동한다. 본능의 승화가 그것이다. 예술가의 작품 창작이나 과학자의 진리 발견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극소수만 할 수 있는 방법이며, 이 극소수조차 이 방법을 통해 완전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또 다른 방법은 현실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를 하는 이는 대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은 그가 도전하기엔 너무 강하다. 인류의 종교들은 이런 점에서 ‘집단 망상’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이를 망상이라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외부 세계에 등을 돌리지 않으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외부 세계에 속해 있는 대상에게 집착하고 그 대상과의 감정적 관계에서 행복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고 있을 때 가장 고통에 무방비하며, 언제든 그 대상을 잃으면 불행에 휩싸일 수 있다.

 

이 모든 방법 중에 완벽한 방법은 없다. 쾌락 원칙은 행복해지기 위한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부과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결코 완수될 수 없다. 이는 당사자가 외부 세계에서 진정한 만족을 얼마나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외부 세계에서 자신을 얼마나 독립시킬 수 있는가, 자신의 원망에 맞추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얼마나 갖고 있다고 느끼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의 정신적 소질은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행복을 얻고 고통으로부터 보호받는 방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강요한다. 종교는 삶의 가치를 끌어내리고 현실 세계의 그림을 망상으로 왜곡시키는데, 이것은 지성에 대한 위협이다. 종교는 인간을 심리적 유아 상태로 묶어놓고 그들을 집단 망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신경증에서 구제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이상의 성공은 거두지 못한다.

 

3.

우리가 언급한 고통의 원천 중 우리는 대부분 우리 자신의 육체, 외부세계(자연)에 대한 지적에는 동의한다. 문제는 사회적 제도이다. 우리는 고통의 사회적 원천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회적 제도는 우리 모두에게 보호와 이익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문명을 포기하고 원시적 상태로 돌아가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명에 대한 이러한 적대적 태도는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프로이트는 당시의 문명 상태에 대한 깊고도 장기간에 걸친 불만이 이 적대적인 태도의 토대이며, 문명에 대한 비난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하여 그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믿는다. 첫 번째 계기는 기독교 신앙이 이단 종교에 승리를 거두었을 때 기독교 교리가 택한 지상 생활에 대한 낮은 평가이다. 두 번째 계기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항해가 진행되면서 원시적 민족이나 종족과 접하게 되었을 때이다. 많은 이들은 원시적 민족들이 그처럼 태평스러운 까닭이 복잡한 문화적 요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로부터 사회의 요구를 폐지하거나 줄이면 다시 행복해질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제 행복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된 문명의 본질로 관심을 돌려보자. 문명은 동물적 상태에 있었던 우리 조상의 삶과 우리를 구별해주고, 인간을 자연에서 보호해주고 인간의 상호 관계를 조정해주는 두 가지 목적에 이바지하는 규제와 성취의 총량이다. 우선, 지구를 인간에게 쓸모 있게 만들고 자연의 폭력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과 자원은 문화적인 것이다. 도구, 불, 주거지, 배와 비행기, 현미경, 사진기 등등. 그러나 높은 문명 수준에 도달한 나라에서는 두 번째 요구가 생겨난다. 아름다움과 청결과 질서이다. 그러나 문명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은 문명이 고도의 정신 작용을 높이 평가하고 격려하며 인간 생활에서 관념에 지도적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종교 체계이다. 학문과 예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명의 마지막 특징은 바로 인간의 상호 관계를 규제하는 방식이다. 문명이 없다면 사회관계는 각자의 자의에 맡겨진다. 육체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자신의 이익과 본능에 따라 사회관계를 결정한다. 개인의 힘이 공동체의 힘으로 대치되는 순간, 문명은 결정적인 걸음을 내닫는다. 즉 문명의 필수 조건은 정의이며, 그 최종 결과는 법의 지배이다. 따라서 인간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자유에 대한 욕망은 이에 대한 저항이자, 문명에 대한 적개심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 개인의 리비도가 발달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리비도의 승화는 전적으로 문명이 본능에 강요한 변화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욕구 단념이야말로 모든 문명이 맞서 싸워야 하는 적개심의 원인이다.

 

4.

그렇다면 문명은 어떻게 발달했고 그 발달 경로를 결정한 것은 무엇인가? 원시인은 노동의 효율성을 위해 가족을 형성했다. 가족 제도의 창설은 성욕이 지속적으로 함께 사는 하숙인처럼 인간에게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원시적 가족은 아직 문명의 요소를 갖추지 못했는데, 아버지의 자의가 전혀 제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족이 형제 무리로 발전하면서 법이 생겨난다. 노동에 대한 강요와 사랑의 힘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과 문명의 관계는 초기의 명백함을 잃어버리고, 사랑이 문명의 이익과 대립하고 문명이 상당한 제약으로 사랑을 위협하는 사태가 초래된다. 이 균열은 처음에는 개인이 속해 있는 가족과 그보다 더 큰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다가, 점차 문명이 성생활을 제한하는 양태로 나타난다. 문명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에 사용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대부분 성욕에서 전용해야 하기에, 점점 더 엄격한 예방조치를 취한다. 오늘날의 문명은 단둘만의 확고한 유대를 바탕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성관계만을 허용하고, 성행위 자체가 쾌락의 원천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며, 지금까지는 인류의 번식 수단으로 성행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행위를 용인하고 있다.

 

5.

그러나 문명이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단 성적 만족만이 아니다. 문명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리비도적으로 한데 묶으려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기독교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요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 가족과 동등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내 가족에게 부당한 처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리는?

 

많은 이들이 진실을 부인하지만, 인간은 공격 본능을 타고 났다.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 성향은 이웃과 우리의 관계를 저해하고 문명에 많은 에너지 소모를 강요하는 요인이다. 이 상호 적개심으로 문명사회는 붕괴 위기를 맞이한다. 따라서 문명은 이 본능을 억제하고자 한다. 그러나 문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인간은 이 공격본능을 만족시키지 않고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문명이 공격 본능에도 이렇게 많은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에, 인간은 문명 속에서 행복해지기 어렵다. 따라서 인간은 이 문명에 불만을 품고 있다. 우리는 우리 문명이 우리의 요구를 더 잘 만족시키고 우리의 비판을 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차츰 변화하리라고 기대해도 좋다. 그러나 문명의 본질 속에는 문명을 개혁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굴복하지 않는 장애가 존재한다는 생각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6.

정신분석 이론 가운데서도 본능 이론은 가장 힘든 이론이다. 프로이트는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식욕과 사랑이라는 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식욕은 개체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본능을 대표하며, 사랑은 대상을 얻으려 애쓰며, 종족 보존을 주요 기능으로 한다. 리비도란 대상 본능의 에너지이며, 식욕과 사랑의 기반이 되는 에너지이다. 그러나 생물 개체를 보존하려는 본능과 그것을 점점 더 큰 단위로 결합시키려는 본능 이외에 그 단위를 해체하여 원래의 무기물로 돌려보내는 본능도 존재한다. 그 본능의 일부가 외부 세계로 되돌려져 공격과 파괴 본능으로 나타난다. 만일 외부에 대한 이 공격성을 제한하면, 이는 다시 내면으로 들어와 자기 파괴를 진행한다.

 

7.

문명은 자신에 적대하는 공격성을 억제하거나 해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거나 아예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 개인의 공격 본능을 내면으로 돌려보낸다. 자신의 자아로 돌려지는 것이다. 양심과 죄책감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개인의 위험한 공격 욕구를 통제한다. 따라서 죄책감의 근원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죄책감은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다. 첫 번째 죄책감은 본능 만족을 단념하도록 강요하고, 두 번째 죄책감은 본능 만족을 단념하는 것만 아니라 징벌까지도 요구한다. 외부의 권위자를 계승하고 부분적으로 그 권위자의 대리인으로 등장한 초자아는 그 권위자의 엄격함을 연장한다. 욕망을 자제하면 권위자와 비긴 셈이고, 죄책감은 전혀 남지 않는다. 그러나 초자아에 대한 두려움은 사정이 다르다. 이처럼 외부에서 닥쳐올지도 모르는 불행은 끊임없는 내적 불행, 즉 죄책감의 긴장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기를 단념하면, 좌절된 공격본능을 초자아가 모두 떠맡아서 자아에 대한 초자아의 공격성이 높아진다. 어린이는 만족을 방해하는 권위자에게 상당한 공격 욕구를 품는다. 그러나 이는 곧 단념해야만 한다. 대신, 공격할 수 없는 권위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여 그 권위자를 자기 자신 속에 받아들인다. “내가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나라면, 나는 아버지를 호되게 다룰거야.” 결론적으로, 초자아의 형성과 양심의 발생에는 타고난 기질적 요소와 현실적 환경의 영향이 함께 작용하는 셈이다.

 

8.

프로이트는 죄책감이 문명 발달에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문명의 진보를 위해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죄책감의 고조에 따른 행복의 상실임을 보여주었다. 결국 문명의 소산인 죄책감은 죄책감으로 인식되지 않고, 대부분 무의식 상태로 남아 있거나 일종의 불쾌감이나 다른 불만으로 나타난다.

 

몇 가지 모순에 대해 검토하고 넘어가자. 첫 번째, 죄책감은 어느 시점에서는 공격 본능이 억제된 결과였지만, 또 다른 시점에서는 공격 본능이 행위로 실현된 결과였다. 즉 사악한 행동에 대한 후회에서 생겨나는 죄책감은 항상 의식되는 반면, 사악한 충동을 지각한 결과로 생겨나는 죄책감은 무의식 상태로 남는 것이 아닌가? 강박 신경증이 이를 입증한다. 두 번째 모순은 공격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 에너지는 단지 외부 권위자의 징벌적 에너지를 계승하여 외부 권위자를 항상 마음속에 살려둘 뿐이라는 견해가 있는 가하면, 그 에너지는 사용되지 않은 자신의 공격 에너지이고 외부로 공격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한 사람은 이제 억압적인 권위자에게 그 공격 에너지를 돌리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첫 번째는 죄책감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편리하지만, 두 번째는 죄책감의 이론을 설명하는데 적합하다. 그러나 이 모순은 거의 해결되었는데, 본질적이고 공통된 요소로 남은 것은 두 경우 모두 내면으로 방향을 돌린 공격 본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인류에게 숙명적인 문제는 문명 발달이 인간의 공격 본능과 자기파괴 본능에 의한 공동생활의 방해를 억누르는 데 성공할 것이냐, 성공한다면 어느 정도나 성공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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