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개혁 나팔수, 기자들은 안전할 거 같은가
[기자수첩] 저성과자 해고, 기자들도 자유롭지 않다… 광고팀 재배치 후 저성과자 낙인 찍게 될 수도
지난 9월 13일 노사정합의문이 발표된 이후 언론들은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대타협’ ‘통 큰 합의’ ‘양보’ ‘존중’ 등 긍정적인 단어가 총동원됐고 “청년 일자리 5년 간 25만 개 늘 것” “‘주 52시간입니다. 근무 불가’ 바뀌는 노동시장” 등 노동시장의 긍정적 변화를 내다본 기사들도 있습니다.
이런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이번 노동개혁의 대상입니다. 기자도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기사로 노동개혁 이후 장밋빛 미래들을 그려내는 기자들, 정작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언론계도 노사정합의의 후폭풍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선 이번 노사정합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저성과자를 대상으로 한 ‘일반해고’는 기자들을 위협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기자들은 업무 특성상 성과를 측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달 내내 취재해도 기사 하나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보도 자료를 베껴서 하루에도 수십 개의 기사를 쏟아낼 수 있습니다.
성과의 기준이 기사의 클릭 수나 기사 개수가 될 경우 기자들은 심층적인 분석 대신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팔아먹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공인노무사인 강진구 경향신문 기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기자는 노동자라는 지위 외에도 자유로운 취재활동을 통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는 공적인 역할을 한다. 이중적 지위를 갖고 있는 셈”이라며 “저성과자 해고 제도가 도입되고 기사의 양이나 클릭수로 평가받다보면 실적 위주의 보도경쟁에 내몰려 기자들의 공적인 지위가 위축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 9월 15일자 동아일보 2면 | ||
이처럼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측에게 달려있습니다. 경영진의 눈 밖에 난 기자는 저성과자로 찍힐 지도 모릅니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기업을 비판해 광고를 끊기게 만든 기자도 경영진 눈에는 저성과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저성과자 해고제도가 편집국장이나 논설위원 등 편집국 간부들에게 확대될 경우 회사의 편집권 침해가 가능해집니다.
나아가 공정보도를 위해 파업을 해도 사측의 편집권 침해를 비판해도 저성과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벌써부터 언론계에는 “어떤 언론사는 SNS에서의 회사 비판 정도랑 파업가담 정도를 지수로 만든다더라”는 흉흉한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해직기자들이 이번 노사정합의에 우려를 표하는 이유입니다. MBC에서 해직됐다 복직한 이근행 PD는 15일 자신의 SNS에 올린 글에서 “그저 사용자가 저성과자라 규정하면 된다”며 “공정방송을 위해 열심히 싸웠던 우리 조합원들은 사측에 의해 대부분 저성과자가 됐다. 이 얼마나 그럴 듯한 알리바이인가”라고 비판했습니다. MBC 해직기자인 박성제 기자도 같은 날 SNS에 올린 글에서 “저성과자 해고는 오너나 경영진에게 마음에 안 드는 놈 맘대로 자를 수 있는 망나니 칼이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박성제 기자는 또한 “나는 MBC 입사 이후 20년 동안 대부분 인사고과에서 높은 등급을 받았고 승진도 빠른 편이었지만 노조위원장 했다는 이유로 잘렸다”며 “나랑 함께 해고된 최승호 선배는 온갖 상이란 상은 도맡아 탔던 대한민국 최고의 시사교양 PD였고 석 달 먼저 해고된 박성호 기자는 시경캡, 국회팀장 출신에 아침뉴스 앵커였다. 앞으로는 우리처럼 ‘성과는 높아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수많은 직장인들의 목이 뎅겅뎅겅 잘려 나가겠지”라고 우려했습니다.
결국 저성과자 해고는 기자들의 실적 경쟁을 촉진시켜 뉴스의 상업화를 가져오고 기자의 공적인 지위를 약화시킬 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기자들은 경영진이 휘두를 ‘망나니 칼’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정부와 언론은 저성과자 해고가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저성과자도 공정한 인사평가를 거쳐야 하고 재교육과 업무재배치 등을 거쳐야 해고가 가능하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는 악용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KT는 ‘부진인력 퇴출 및 관리방안’이라는 프로그램을 가동해 명예퇴직을 거부하거나 노조 경력이 있는 노동자들을 내보냈고, 이 과정에서 업무재배치라는 이름으로 114 상담을 하던 내근노동자에게 전봇대 점검을 시켰죠.
기사만 쓰던 기자가 저성과자로 낙인 찍히면, 생판 처음 접해보는 디자인팀으로 ‘업무재배치’가 될 겁니다. 거기서 성과를 못 내면 광고팀으로 재배치가 될 수도 있죠. 거기서도 성과를 못 내면, 회사는 ‘업무재배치와 재교육을 거쳤는데도 저성과자다’라며 해고할 수도 있습니다. 2012년 파업에 가담했던 언론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스케이트장 관리를 맡기려 하거나 브런치 만드는 법을 교육시켰던 사례가 이미 있습니다.
노사정합의의 더 큰 문제는 ‘저성과자 해고’로 사측의 힘을 높여준 반면 이를 견제해야 할 노조의 힘은 확 빼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언론사 노동조합에는 전임 간부 외에 일을 하면서 노동조합 일을 병행하는 노조 간부들이 꽤 많습니다. 회사 업무와 노조 업무를 병행하는 만큼 다른 기자들에 비해 성과를 내기 어려운 처지이며, ‘저성과자’의 위협에 크게 노출돼 있습니다. 노조 간부를 했다고 저성과자로 찍히면 누가 노조에서 일하려 할까요?
취업규칙 변경 완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노조의 동의나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가 없어도 사측이 취업규칙을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변경할 수 있습니다. 노조가 있으면 단체협약 때문에 안전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보통 법원에서도 인사평가기준 등은 경영권에 속하는 사안으로 보고 꼭 단체협약이 아니라 취업규칙을 통해 변경해도 된다고 판단합니다. 인사기준을 사측이 취업규칙으로 결정하고 이를 노조의 동의 없이 밀어붙일 경우 회사에 찍힌 언론노동자들이나 노조 간부들을 마음대로 발령 내기가 수월해집니다.
이번 노사정합의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이들은 노조가 없는 사업장의 노동자들입니다. 노조가 있는 곳은 그나마 단체협약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사측의 일방적인 해고에 쟁의권을 동원해 맞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조가 없는 언론노동자들은 보호장치도 힘도 없습니다. 강진구 기자는 “노조가 없는 사업장이 노조 있는 사업장보다 더 사용자의 우월적 지위에 종속되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노조가 없는 보수언론과 경제신문들이 가장 앞장서서 노동개혁의 장밋빛 전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용노동부로부터 돈을 받고 노동개혁을 홍보하는 기사를 쓰기도 합니다. (관련 기사 : <돈 받고 정부 홍보기사 써준 언론사를 공개합니다>
일방적으로 노동개혁을 홍보하는 기사를 쓰고 고용노동부한테 돈을 받으면 그 돈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그 일방적인 홍보기사는 노사정합의의 추동력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번 합의는 그런 홍보기사를 쓴 기자들의 미래를 덮쳐올 지도 모릅니다. 노동개혁의 칼날이 기자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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