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는 거의 없도록 썼지만, 주의하시길....
<어벤져스4: 앤드게임> 전 마지막 마블 영화 <캡틴마블>을 보고 왔다. 어벤져스 배경 이전인 1980~90년대를 다루고 있기에 다른 마블 영화와의 연결고리들이 많다. 그래서 마블 팬이라면 이스터에그 찾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앤드게임을 보기 전에 꼭 봐야하는 건 아니다. 일종의 독립영화기 때문이다. (물론 쿠키영상 빼고)
개봉 전부터 페미니즘 논란이 있었는데, 오히려 일반적인 히어로 영화에 가깝다. 배경이 1980년대고 주인공이 비행기 조종사라는 (당시에는 남성적이라고 여겨진)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그런 요소가 등장은 한다. 하지만 그런 요소는 시련을 이겨내야 히어로로 거듭난다는 클리셰적인 장치로 활용되는 차원일 뿐, 페미니즘 요소가 전면으로 다뤄지진 않는다.
오히려 눈에 들어온 건 마블이 힘, power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였다.
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나 만화가 가장 다루기 힘든 주제가 힘이다. 관객이나 독자들은 히어로 영화를 보며 늘 더 업그레이드된 강함을 갈구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더욱 강해져야 하고, 빌런도 더욱 강해져야 한다. 조연들도 같이 강해져야 한다. 안 그러면 밸붕(밸런스붕괴)이 이루어져 주인공 싸우는 옆에서 방해만 되거나 해설자, 지략캐로 전락한다.
드래곤볼이 그랬다. 처음에 에네르기파만 쏘던 손오공은 나중에 초사이언이 된다. 적들은 사이어인에서 프리더, 셀, 마인부우, 비루스까지 점점 강해지고 손오공과 일당들도 점점 강해진다. 인플레가 벌어져서 나중엔 개나소나 다 행성을 파괴할 능력을 갖추고 처음에 막강했던 조연들은 쩌리가 되거나 전투력 측정기 취급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야무치..야무치의 사망장면을 일컬어 "야무치의 웅크린 포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안습 신세다.)
마블은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히어로의 정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힘만 세다고 히어로의 자격이 있는가?"
캡틴아메리카는 슈퍼솔져 혈청을 맞고 강해지기 전부터 히어로였다. 왜소한 몸집에 체력은 약했지만 거리낌없이 수류탄으로 몸을 던졌고, 얻어맞으면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힘이 세진 이후에도 그가 싸우는 적들은 힘만 센 적들이 아니다. 적만 없앨 수 있다면 자유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국가, 그리고 그에 동의하는 동료들, 그 사이에서 벌어진 분열 등등.
어벤져스 세계관에서 캡틴은 어느새 힘만으로는 약한 축에 속하지만 그가 없는 어벤져스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언제나 더 강한 적들에 맞서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슈퍼솔져 혈청 맞는다고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토니스타크는 군산복합체의 수장이었으나 자신이 만든 무기가 나쁜 목적에 사용된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의 기술력을 이용해 아이언맨이라는 히어로가 되었다. 그는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늘 더 첨단의 기술을 이용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반복하고, 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히어로로써 성장한다.
아이언맨3에서 아이언맨은 자신이 미친듯이 만든 아이언맨 슈트들을 모두 폭파시켜버린다. 아이언맨3 최고 명장면으로 꼽힌다. 힘에만 집착한다고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아이언맨이 깨달은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힘을 갖고 있던 히어로들은, 늘 영화 속에서 한 번은 힘을 빼앗긴다. 대표적인 캐릭터가 토르다. 토르는 토르1편에서 맘대로 힘을 남용하다 아버지 오딘에게 힘을 빼앗겼고 힘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다시 힘을 되찾는다. 힘이 없어도 사람을 구하려는 정신이 있어야 히어로의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인피니티워>에서 마블은 토르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동생은 죽었고, 자신이 지키려던 백성들은 타노스에게 전멸당한다. 이미 자신의 무기 묠니르는 박살났다. 모든 것을 빼앗긴 토르는 하지만 화려하게 돌아온다. 토르가 지구에 돌아오던 장면이 <인피니티워> 최고의 명장면인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히어로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인피니티워 최고의 명장면..!)
<홈커밍>에서 아이언맨은 스파이더맨이 사고를 치자 슈트를 빼앗아간다. 스파이더맨이 "슈트없이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호소하자, 아이언맨이 말한다. "슈트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넌 더더욱 이걸 가져선 안 돼." 힘만 세다고 히어로가 아니라는 마블의 일관된 정신을 요약한 대사였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이 만든 허접한 슈트를 입고 적들을 상대하며, 히어로로 거듭 태어난다.
캡틴마블 이야기로 돌아가자. 캡틴아메리카에게 히어로의 자격이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며, 아이언맨에게 히어로의 자격이란 실수를 통해 성장하는 법을 깨닫는 것이다. 토르에게 히어로의 자격이란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절망하지 않는 강인함이다. 그렇다면 캡틴마블에게 히어로의 자격이란 무엇일까?
캐럴 댄버스(캡틴마블)는 자신이 힘을 얻게 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힘이 외계종족인 크리종족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늘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을 통제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캐럴댄버스가 성장한 순간들은 세상이 가르친 것을 거부한 순간들이었다. (이 대목에 페미니즘의 요소가 들어가 있다.) 세상이 규정한 것을 거부하고 내가 누구인지 나 스스로 규정할 때 캡틴마블은 자신의 힘을 가장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는 말한다. "넌 손에서 나오는 그 불광선이 없을 때부터 히어로였다"고.
여러 설정, 다소 오그라드는 전개 등등 빈틈은 있는 영화였다. 오락용 영화로 좋지만 놀랍도록 잘 만든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마블은 마블이란 걸 기억하자. <토르1>은 (내가 부제도 기억못할 정도로) 허접했다. 하지만 라그나로크와 인피니티워의 간지철철 토르가 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영화였다. 마블 영화는 한 편만 독립적으로 평가해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장르다.
(캐럴댄버스는 이때부터 히어로였다.)
일각에서는 갑자기 너무 쎈 히어로가 나와서 밸런스 붕괴를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캡틴마블이 타노스 걍 이겨버리면 어쩌지? 마블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기우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블의 가장 큰 장점이 히어로의 힘을 잘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마블이 디씨 영화보다 뛰어난 결정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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