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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인문, 사회과학

삼성 노동자들이 말하는 삼성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

삼성 노동자들이 말하는 삼성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

[서평] 환상 / 박종태, 김순천 저 / 오월의봄 펴냄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김순천, 오월의봄)라는 책이 있다. 대한민국의 기업들의 나쁜 행동을 폭로하는 책이다. 이 책의 첫 장은 삼성전자 노동자 이수인의 이야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쓴 부분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로 되어 있다. 저자 김순천은 “원고를 다 완성해놓았는데 인터뷰했던 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피해를 입을까봐 못 싣겠다고 한다. 고민 끝에 회사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직장인들을 위해 이 공간을 남겨놓기로 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

저자
김순천 지음
출판사
오월의봄 | 2013-01-0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기업은 왜 노동자를 불행하게 하는가?나를 지켜주는 기업이 필요해...
가격비교


출판사와 작가는 이 백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쁜 기업’ 중에 누가 제일 나쁜 기업인지 폭로한 것이 아닐까. 사측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노동자의 모습, 그것이 <나쁜 기업 보고서>가 백지를 통해 폭로한 삼성전자의 모습이다.
 
노동자 이수인이 백지 속에 묻어둬야 했던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 나왔다. 삼성과 싸운 노동자 박종태가 삼성의 실상에 대해 들려준다. <나쁜 기업보고서>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풀어냈던 김순천이 이번엔 박종태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환상: 삼성 안에 숨겨진 내밀하고 기묘한 일들>(오월의봄)은 삼성전자 노동자 박종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삼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을 걷어낸다.
 
이 책은 크게 네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노동자 박종태가 삼성에 입사한 뒤 경험한 일들이다. 박종태가 증언하는 삼성의 모습은 거대한 권력을 연상시킨다. 면담이라 쓰고 취조라 부르는 행위를 통해 직원들을 압박하고, 성과급과 인사고과를 통해 사람을 기절시킬 정도의 노동 강도로 몰아붙인다. 직원들의 다이어트와 체력까지 일일이 관리하기도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협의위원’ 박종태가 노동자들을 대표해 삼성과 싸우는 이야기다. 국정감사에서 모 삼성전자 사장은 “삼성에는 노조보다 더 나은 한가족 협의회가 있어 노사 간의 여러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종태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 삼성은 자신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협의위원들을 심어두고, 협의위원이 된 박종태가 사측의 부당한 조치에 저항하자 징계와 면직으로 대답했다. 사람이 죽어도, 어느 날 갑자기 3000억 원이 사라져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곳이 삼성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협의위원 박종태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사측은 박종태의 협의위원 활동을 막기 위해 러시아로 출장을 보내고 이를 거부하자 직무대기 조치를 취한다. 박종태는 그 과정에서 따돌림까지 당했다고 말한다. 유서를 두 번 쓰고 정신병원에서 치료까지 받은 박종태는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실감한다. 하지만 고 이병철 회장의 유언에 따라 삼성에서는 무노조가 경영의 제1원칙이다. 사내 인트라넷에 노조 이야기가 올라오는 순간 글은 사라지고, 글을 올린 사람은 회사로부터 압박을 받는다.

네 번째 이야기는 ‘해고’노동자 박종태가 삼성과 싸우는 이야기다. 박종태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비판하고 삼성이 노동자들의 글을 함부로 삭제한다는 사실을 비판했다가 해고를 당했다. 해고자가 된 그는 삼성과 싸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불산 사고를 당한 사람들, 백혈병을 얻은 삼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삼성이 ‘이건희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환상

저자
박종태 지음
출판사
오월의봄 | 2013-04-2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
가격비교


삼성이 국내 제일의 기업, 나아가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근간에는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삼성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이건희 회장을 떠올리며, 경영진의 노고를 떠올린다. 박종태는 이것이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삼성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이 환상이 걷히고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희생에 주목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박종태는 삼성이 해고를 통보한 뒤 사무실에 들어가려는 자신을 막았다고 말한다. 사무실에 무언가를 두고 나왔다고 하자 사무실에 쌓여 있던 모든 것들을 가져다 놓았다. 냉장고에 약이 있다고 하자 냉장고를 통째로 들고 나와 그의 앞에 내놓았다. 그의 해고가 직원들에게 알려지고 또 직원들의 공감과 분노를 일으킬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 책은 노동자 박종태가 사측 직원들을 뚫고 들어가 그의 친구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라는 이야기"가 책을 읽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독자들도 이 책을 덮는 순간, 삼성의 겉모습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같이 덮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