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인문, 사회과학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와 비전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와 비전은?

[서평] 정치와 비전 3/ 셸던 월린/ 후마니타스 펴냄


“정치가 실종됐다”

오늘날 한국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합의와 협상 없이 독단적으로 중요한 정책이 결정되거나, ‘공적인’ 원칙이 아닌 이해관계와 같은 사적인 원칙에 의해 정치가 작동할 때, ‘정치가 실종됐다’고 말한다. <정치와 비전>의 저자 셸던 월린의 문제의식도 이와 유사하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셸던 월린은 그의 저작 <정치와 비전: 서구정치사상사에서의 지속과 혁신>을 통해 ‘정치’와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 개념들이 처음 등장한 고대 아테네부터 그 개념이 서구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지속되고 혁신되었는지 살펴본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정치와 비전>은 60년대 첫 출간되었고, 40년이 지난 후 저자는 7개장을 새롭게 추가해 업그레이드 된 <정치와 비전>을 선보였다. 한국의 정치학자 7명은 2007년과 2009년에 걸쳐 <정치와 비전>을 번역해 1,2권으로 나누어 출간했다. 그리고 최근 월린이 새롭게 추가한 7개장을 번역해 <정치와 비전> 3권으로 출간했다.

<정치와 비전>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개념은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이다. 월린이 강조하는 ’정치적인 것’이란 공동체 구성원 간의 차이를 정당화하고 화해시키며, 공통성을 유지․보존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이는 공공선이 무엇인지 모색하고 찾아 나서는 구성원 전체의 노력을 의미한다. 월린은 이러한 ‘정치적인 것’을 ‘민주주의’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즉 월린은 ‘정치적인 것’을 상실하고, 정치가 실종된 공동체에는 민주주의가 부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정치와 비전> 1권과 2권이 정치적인 것과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구의 사상을 중심으로 소개했다면, 3권은 ‘비전’에 초점을 맞췄다. 월린은 3권이 지닌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치와 비전>을 집필했다고 할 수 있다. 월린이 <정치와 비전>을 출간한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째는 역사적 배경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나치즘 등 전체주의를 누른 또 하나의 슈퍼파워로 등극하고, 이에 따라 미국 내에서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정치사상 등이 사라지고 자유민주주의만이 남았다.

두 번째는 사상사적 배경이다. 2차 세계대전 전후로 ‘행태주의’, 즉 ‘정치과학’이 정치학을 대변하게 되었으며, 정치학은 그 독자적인 성격을 상실한 채 합리적인 개인들의 행동 패턴과 이익집단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단순한 반영으로 환원되는 일종의 과학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를 통해 정치적인 것과 공적인 것에 대한 탐구가 사라졌으며 정치는 권력을 둘러싼 통치엘리트들 사이의 경쟁으로 축소되어버렸다. 월린은 이러한 지적 경향에 도전장을 내밀고, 이러한 지적 경향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탐구한다.

월린이 찾아낸 하나의 지적 경향이 바로 ‘전도된 전체주의’다. 월린은 전체주의에 맞섰던 미국이 파시즘과는 다른 방식의 전체주의, 즉 전도된 전체주의로 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역사의 종언’으로 대표되는 승자의 관점이 아니라, 미국이 자신들이 패배시킨 적을 전도된 닮은 꼴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패자의 관점에서 미국을 진단한다. 월린은 현재 미국이 처한 현실, 전도된 전체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치즘이 시민들을 동원하는 체제라면, 전도된 전체주의는 이전에 있었던 민주화의 경험에 겉치레의 찬사를 보내면서 시민들을 탈정치화 한다. 나치가 대중에게 집합적인 힘에 대한 의식과 자신감, 또는 기쁨을 통해 느끼는 힘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던 반면,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는 나약함의 느낌, 곧 민주적 신뢰의 부식, 정치적 무관심, 자아의 사사화에서 정점에 이르는 집단적 무력감을 촉진시킨다. 나치가 불평불만 없이 지배자를 지지하고 잘 관리된 국민투표에서 열정적으로 '찬성표'를 던지는 지속적으로 동원되는 사회를 원했다면, 전도된 전체주의의 엘리트는 좀처럼 투표에 나서지 않는 정치적으로 탈동원된 사회를 원한다”




정치와 비전. 3

저자
셸던 월린 지음
출판사
후마니타스 | 2013-08-1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1.이 책은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 셸던 월린Sheldon ...
가격비교


한국의 현실을 떠올려보자. 많은 사람들은 국회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정치활동을 ‘불필요한 싸움’ 정도로 치부하고 혐오하면서, 여야가 합의해서 ‘민생’을 살리는 데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민생을 살리기 위해 국회의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문가들과 정치적 엘리트들이 연구해 내놓은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뿐이다. 정치 엘리트들이 만드는 법과 제도는 각종 여론조사와 통계 수치들에 근거한다. 이것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정치의 전부가 아닌가.  

월린은 자유주의 사상가들, 존 듀이와 칼 포퍼, 존 롤스 등의 사상을 탐구하며 이들이 정치의 실종에 기여했다고 비판한다. 월린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 사상가 칼 맑스도 비판의 대상이다. 월린에 따르면 맑스는 국가의 중앙집권화를 비판하며 국가를 해체하고, 행정적 기능만 담당하는 국가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경제가 정치를 압도하면서 정치의 의미가 행정으로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월린은 이러한 비판을 통해 ‘탈근대적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탈근대적 민주주의란 하나의 영구적인 형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다수의 필요와 열망에 관한 기초적인 정치로 재개념화하는 것이다. 월린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제도화된 과정이 아니라 순간의 경험이며, 고생고생해서라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인 사람들이 절실하게 느끼는 고충이나 필요에 대한 반응의 결정체로 인식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란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는 행위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월린은 이러한 민주주의와 정치적인 것의 부활이 오직 작은 규모에서만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학교‧지역‧의료기관이나 경찰서‧소방서‧휴양 시설‧문화시설 등 분산되어 있는 조그만 장소의 다양성에, 평범한 사람들의 독창성에 달려있다. 이는 총체성을 추구하는 전체주의와 대비되는 다양성의 정치다. 월린은 탈근대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지역주의와 탈근대적인 원심주의를 결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전이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남는다. 과연 다양성의 정치와 작은 규모의 민주주의가 반민주주의적인 통치와 정치적 혐오를 추구하는 총체성의 정치, 즉 전도된 전체주의에 맞서면서 이와 다른 대안을 제안할 수 있을까.

월린이 제안하는 ‘탈근대적 민주주의’가 기성 체제에 대한 분산적이고 고립적인 반란의 몸짓에 그치면서, 결국 전도된 전체주의가 자신의 체제를 위협받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또 다른 슈퍼파워 미국과 ‘자유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았던가. 결은 다르지만 맑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체제 전복을 꿈꾸고, 레닌과 마오 등의 혁명가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이유도 이러한 고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월린의 맑스 비판이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비록 그의 대안이 현실성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의 ‘비전’이 정치의 실종에 직면한 한국현실에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의 문제제기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