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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단상

차라리 토익공부를 하세요.

글은 아니고 메모에 여기저기 휘갈겨내렸던 단상들을 합쳐놓아보았다.

차라리 토익공부를 하세요, 여러분.

내가 지나치게 씨니컬한 것일지 몰라도, 또 비관적일 지 몰라도.

(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박해보이는 것을' '천박해보인다고' 말하는 데 주저하진 않을 것이다.

(2) 미리 하나 더 추가하자면 나는 '그래, 너 생각도 옳다. 하지만 내 생각도 옳다.'는 식의 뒤틀려진 포스트모더니즘적 용법에는 과감히 정색을 할 것이다. '옳다'라는 진리의 용법을 사용하면서, 거기다 전혀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모두 진리라고 말하는 건 '말 그 자체로' '틀린' 말이다. 거기다 나름대로 정당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용법인, '너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다' 는 그냥 텅 빈 레토릭이다. 1 더하기 1은 2입니다. 라는 당연한 사실을 읽어대는 이 말을 반복한들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건 나도 알아, 임마". 중요한 건 그 이후,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인데. 내 답은 이렇다. "너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다." "그래,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생각을 좀 더 밀고 나가볼게." 좀 더 밀고 나가보자.

(3) 지금보다 더 감상적으로 반항적이었던 고등학교 시절 ebs 토론회 방청객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당시 내 최고의 관심사였던 두발자유가 주제란 이유로 즉각 지원해서 달려갔는데, 그곳에는 학생들의 인권을 옹호한다고 노력하는 약간 너저분한 수염을 기른 사람 하나와 딱 보기에도 재수없이 생긴 늙은이가 한 명, 또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모범생 둘이 패널로 앉아 있었다. 그 늙은이가 학생은 공부를 해야, 어쩌구 지껄이는 소리에 들고 있던 물컵으로 머리를 찍어버릴 충동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의외의 습격은 오히려 우리 편에게서 왔다. 1부 토론 쉬는 시간 직전 범생이 중 한 명이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공부 열심히 할테니까, 머리 좀 기르는 거 허락해주세요. 저희가 열심히 할게요."

나는 그 말 이후 이어진 말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재수없는 늙은이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역겨운 모습만이 기억날 뿐이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서 나를 충격에 빠드린 그 발언의 주인공을 마주쳤다. 범생이가 웃으며 인사하는 데 난 빡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으며 그에게 말했다. (욕은 생략) "차라리 그냥 머리깍는다고 하시지 그랬어요?"

(4) 대한민국청년 뭐시기, 한국대학생무슨무슨연합, 어쩌구 같은 것들을 보면 정말, 진심으로 안타깝다. 글로벌리더 어쩌구 소리할 때는 동정심까지 들 지경이다. 요즘 세태의 가장 특징은, 이런 식의 대학생연합과 각종 공모전 등의 활동을 사회참여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대학 때 뭔가 특별한 것을 하고 싶어서요." 전혀 특별하지 않다. 기성세대 앞에서 "우리 이렇게 열심히 삽니다. 20대도 이렇게 열심히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정해달라구요!" "아우 그랬쩌여? 참 잘했어염 우쭈쭈." "자네들 요즘 젊은이 답지 않군. 허허허. 흐뭇흐뭇." 이게 뭐가 특별한건가, 도데체.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면서 윗 세대에게 인정받길 간절히 욕망하는 이들은 사회참여를 한다고 느낄 지 몰라도 가장 현실과 동떨어진 채 비사회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5) 결국 20대에서의 담론 투쟁이라 함은 이런 식의 고차원적인 자기계발과의 투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 차라리 20대가 (이 따위 뻘짓보다) 토익 공부를 하고 학점 공부에 전념했으면 한다. 대학생연합 같은 자기계발은 상황에 내몰린 자기계발을 넘어서 아예 그 구조 속에 능동적으로 들어가 구조를 활기차게 해주는 가장 보수적인 담론이기 때문이다. 칼 끝을 겨누어야 가장 시급한 곳은 이곳이기도 하다.

(6) 그럼에도 내가 아직 인간적 절망감을 느끼는 이유는,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내 칼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은 내 친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내 동기들 후배들 선배들이 내 칼을 받고 당황해할 것이다. 좌파하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친구 다 없어지겠네.

* 별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다 말겠지 라는 포기심정으로 다 눈감고 귀막고 넘겨준다 치자. 아무리 그래도 그들끼리 모여서 자기PR하면서 "5분내로, 3분내로 자기 소개 해보세요." 이건 정말 오그라든다. 어색한 분위기에 모여서 마치 '프로젝트'하듯이 과제를 수행하며 '창의력과 발표력 그리고 문제해결능력을 기르자'는 이 무슨무슨연합들의 주요사업들이 '특별한 것'이라 여긴다면, 이 광경이 당신네들이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 아닐지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배우와 무대만 바꼈을 뿐 TV에 자주 나오는 기업 속의 팀 프로젝트 광경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취직하기 위한 스펙 쌓기에 질려서 온 곳이 고작 취직 그 이후의 광경이다. 정말 '특별'하군요. 그냥 솔직히 기업 취직하기 위한 능력을 기르고 싶다고 말하면 참 좋겠다. 왜 뭔가 대단한 짓이라도 하는냥 이리저리 둘러대냔 말이다.

아니, 오히려 무슨무슨연합들의 그 행위가 그 어떤 스펙쌓기보다 더 비-사회적인 이유는, 취직하기 위한 고통의 과정을 대변하는 스펙 쌓기의 과정은 그 안에서 '모순'이라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취직하기 존나 힘들어요."라는 현실이라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취직 그 이후'를 대비하는 이 대학생의 자발적 조직들은 그 모순도 드러내지 못하고 현실 자체를 뭉개버린다. 제발, 지루하고 재미없어도 차라리 토익 공부를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