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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단상

그래, 나는 편향적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우리학과에서 이른바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교수님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때 한 손에 한겨레 21이라는 잡지를 들고 있었는데, 그 때 교수님이 그걸 보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신문 읽지 말게. 그 신문 나쁜 신문이야. 너무 시각이 편향되어 있어.” 사실 조갑제와 친분이 있음을 은근히 자랑하는 그 교수님 앞에 한겨레21을 팔락거린 것은 당시 유치했던 나의 도발이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편향적이에요. 그래서 읽어요.” 

흔히 ‘넌 너무 편향적이야.’라는 드립을 치는 사람들은 나름 ‘정치적 중립’을 지향한다고 한다. 과연 어떤 ‘실천’을 하고 살아야 정치적 중립을 지향할 수 있는 지 우매한 나로선 알 수 없으나, 나는 그들이 원하는 기준에 의하면 매우 중립적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빠져 있지도 않고 오히려 주류경제학을 더 많이 탐독했으며 한겨레,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경향신문만 보지 않고 민족지 조중동과 심지어 월간조선과 뉴데일리 같은 것들도 읽으며 매일 아침 빡친다. 강준만과 고종석 같은 합리적 우파들은 물론 조갑제나 이인화, 김동길이 쓴 글들도 즐겨 읽는다. 나는 내 정신건강을 해칠 각오까지 하면서 중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총동원한다. 그러나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인 것뿐이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이다.

그렇기에 혹자들이 나에게 ‘편향적이다’라고 하는 비판은 결국 ‘넌 왜 이렇게 좌파적이냐’는 질문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버전으로 꾸민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만적인데, 우선 내가 극우파들과 우파들의 저서를 우파인 당신네들보다 더 탐독해왔다는 걸 몰랐을 경우, 내가 좌파 서적만 읽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는 점에서, 나를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 책 몇 권과 안 좋은 친구 몇 몇에 세뇌당해 철없이 맑스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20대에 맑스주의자가 안될 수 있느냐!’는, ‘고로 30,40대는 맑스주의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개드립이 가능해진다. 다음으로 내가 중립적이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것을 알 경우 그들은 그냥 이 모든 노력들과 시도들을 무시하고 그저 좌파적임에 분개한다는 의미이다. 그들 앞에서 맨큐의 경제학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책을 들고 다녀도 조선일보를 자랑스럽게 펼쳐보여도 그 누구도 ‘넌 너무 편향적이야.’라는 말을 하지 않는데, 한겨레21을 들고 다니고 맑스의 책을 한두 권만 가지고 다녀도 ‘넌 너무 편향적이야’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이건 단지 말이냐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말 하는 당신이야말로 진심으로, 레알 ‘편향적’임.

그래 좋다, 내가 좌파이자 편향적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치자. 그래도 2가지 문제가 걸린다. 일단 내가 편향적이라 함은 두 가지 지향을 담고 있는 주장인데, 첫 째는 정치적 중립을 지향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좀 우파적으로 살아보라는 거다. 글쎄, '이데올로기 종언이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이듯이, 중립을 지키라는 것 역시 굉장히 편향적이라는 점에서 첫 번째는 자가당착이다. 이는 자칫 정치적 무관심과 패배주의를 정당화할 논지로 쓰일 혐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넌 왜 우파가 아니고 좌파냐는 건데, 이건 사회적 문제다. 나도 우파로 살고 싶었다고, 미국에서만 살았어도 우파로 살았을 거다. 근데 조금만 사회 문제 지적하면 다 좌파 빨갱이인데, 뭐하러 우파하냐, 그냥 좌파하고 말지. 난 그냥 어차피 욕먹는 거 좌파하련다. 너흰 중립으로 가장한 비중립 혹은 무관심을 지향하거나, 합리적 우파하려다 좌파라고 욕먹으면서 그렇게 살으렴.

나는 얼마 전 화제의 영화 아바타에서 한 장면을 보고 엄청난 오르가즘을 만끽했다. 바로 지구인들이 나비족을 공격하려고 보낸 전투기들이 와이번들(?)에 의해 습격당해 박살나는 장면이었다. 자연은 늘 어머니였다. 자애로운 어머니. 현실에는 없는. 자식들에게 모두 똑같이 사랑을 나누어주는 그래서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어머니 말이다. “에이와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아.” 그런데 “에이와 님이 네 말을 들어주셨어!” 제이크의 기도에 공감했는지, 온갖 생물들이 그들을 습격한다. 에이와가 편을 들어 버린다.

 

 


아바타 인문학

저자
최정우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 2010-06-30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인문학 영화관에서 색안경을 쓰다『아바타 인문학』. 영화 아바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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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익은(얼마 전 점심식사 자리에서 이 문제로 이야기하기도 했었다.)「진정한 헐리우드 좌파 2편」(『아바타 인문학』 중)에서 이 장면이 바로 공산주의적 시퀀스를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나비족은 에이와의 지배하에 살아가던 그 체제 하에서 나름의 규칙을 수행하던 이들이었는데, 에이와를 물욕에 눈이 먼 인간들이 공격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은 그 혼란을 통해서, 에이와의 지배하에 있었으면 스스로 할 수 없었을 ‘구성’을 해냈다. 제도와 규칙을 조정하여 적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파들은 좌파들에게 ‘공산주의가 도대체 가능하냐? 뭐냐 그게?’라고 묻는다. 글쎄, 뭔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역능은 우리의 체제가 박살남으로서 가능해진다. 그것이 우리의 지향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중립적이던 에이와가 중립을 깨부수고 어느 편을 들어버림으로써 승리할 수 있게 된다. 에이와의 파괴는 1) 인간들에 의한 물질적 파괴 2) 편을 들어버리는, 자기 정체성의 파괴라는 두 가지 파괴를 통해 나비족을 승리로 이끈다.

나를 편향적이라고 충분히 욕하라. 나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천박한 자기계발담론과 사회참여라 착각하는 비-사회참여가 판치는 이 판국에서 편향적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중립이라는 에이와를 철저히 박살내야만 한다. 그리고 우파들은 좌파를 위협하기 위해 우리의 에이와를 공격하면서 결국 좌파의 부활과 재구성을 방해하던 요소가 다름 아닌 에이와였다는 사실을 알고 후회하고, 패배할 것이다. 나를 편향적이라고 쉼없이 공격해 주시게. 그럴수록 우리는 승리에 도달할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