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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이탈리아 여행기

2024 로마 여행기 INTRO: 16년 만에 돌아온 로마

2008 년  7 월  23 일 ,  유럽여행 중 일기

스무살, 로마 테르미니역 ATM을 부셔버리고 싶었던 이 화 많은 인간은 16년 만에 로마에 다시 돌아올 줄 알았을까.

아무래도 테르미니역 ATM 악령의 저주보다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로마로 다시 돌아온다는 트레비 분수 지박령의 저주가 더 강력했던 모양이다.

2008년 여름, 트레비 분수 앞의 본인

추석 연휴, 개인 휴가를 합쳐 약 8~9일의 시간이 생겨난 나의 여행지는 이탈리아 로마였다.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근본 있는 도시를 방문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 도시에 담긴 세월의 흔적 때문이다.

온갖 풍파를 견디고도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유적들, 목이 잘리고 팔이 하나 잘려도 기어이 버티고 우리 앞에 보란 듯이 서 있는 조각들을 보면 내가 짧은 인생을 겪으며 경험하는 세상의 풍파쯤은 매우 하찮게 느껴진다.

로마도 그랬다. 로마는 고대와 중세와 바로크가 교차하며 2,000년의 역사를 건설한 도시다. 그 안에선 제국의 꿈과 공화정의 이상이, 다신교의 신화와 보편종교의 가르침이, 미켈란젤로의 엄격함과 베르니니의 생동감이, 그리고 그곳을 살아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발자취가 자신을 뽐내듯 다투고 있다.

그래서 로마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고 잘 모르고 가면 충만하게 느끼기 어려운 도시다. 2,000년의 역사를 10일도 안 되는 시간으로 어떻게 경험하겠는가.

그래서 기록 차원에서, 또 로마 여행을 가려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더 많이 느끼고 덜 어려웠으면 하는 마음에 이번 여행 관련해 생각나는 모든 것을 기록하려고 한다.

여행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내가 경험한 로마여행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첫째, 소위 (무계획성) ‘P’들이 여행하기엔 최고의 여행지라 장담할 수 있다. 내가 P이기 때문에 느낀 것이다.

물론 당연히 계획은 세우고 떠났다. 그러나 파워J가 아닌 P(대충) 세우는 계획은 로마 앞에서 무의미하다는 것을 로마 땅을 밟자마자 깨달았다. 예컨대 첫째 날 여행지로 스페인 광장 보르게세 미술관을 잡았으나 보르게세 미술관이 예약제로 운영됨을 알자마자 이 계획은 무너졌다. 바티칸 갔다가 성천사성에 가겠다는 계획 역시 성천사성을 미리 예약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된 뒤로 다 무너졌다.

보르게세미술관은 2시간 단위로 예약을 받는다. 예약이 다 차 있어서 가장 빠른 선택지가 목요일 오후 1-3시였다.

 

여행 과정에서도 이런 일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애써 오전에 찾은 한 신전에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었고, 오후에 찾은 한 성당은 미사 중이라 나가라거나 오늘은 안 하니 내일 오라는 말로 나를 맞이했다. (미리 알아봤으면 되는 거 아냐?’라고 물어보면 할 말은 없다)

거듭 말하지만 '왜 미리 알아보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계획이 조금 일그러져도 여행에 큰 영향이 없다. 길 따라 발 따라 걷다보면, 발이 아플 때쯤 당도할 무명의 교회, 아무 성당에나 들어가도 모두 작품이고 걸작이다. 한 번쯤 아예 구글 지도를 꺼버리고 길을 잃어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지.

비교해보자면 나는 이집트를 너무 사랑하지만 사막에서 길을 잃거나 피라미드 보러 갔는데 피라미드가 문을 닫았다고 상상해보자.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로마는 그래도 되는 곳이다.

심지어 교통수단도 계획대로 잘 운영되지 않는다. 사실 914일 저녁 FCO(피우미치노)공항에 도착한 뒤 테르미니역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그랬다. 14유로짜리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열차를 타는 게 가장 빠르다고 해서 열심히 티켓을 샀는데, 열차는 운영되지 않았고(파업 때문인지 뭔지 모르겠다) 50분 걸리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공항에서 맞이해주는 FCO 공항. 이곳은 FCO라고도, 피우미치노공항이라고도, 레오나르도다빈치공항이라고, 때론 로마공항이라고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곤 한다. 하나이자 동시에 여러개인 로마의 역사와도 같다.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티켓. 14유로 주고 샀는데 버스를 타라고 한다.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가 운영되지 않아 버스를 타라고 안내해주었다.

 

오후 738분 출발하는 차가 매진됐다고 해서 88분 표를 끊었는데 막상 가보니 상관없으니 그냥 타라고 한다. 표 사는 곳에선 열차 대신 탈 버스엔 캐리어를 넣을 공간이 없다고 안내까지 해주었는데, 버스에 가보니 캐리어들로 가득 차 있다.

덕분에 머리 위 선반에 놓여 있던 캐리어가 운행 중 떨어지고 지X염병을 했으나 그래도 문제 없이, 심지어 예상보다 일찍 테르미니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로 가는 첫 발걸음부터, 단 한 번도 예측대로 여행할 수 없었던 도시가 로마였다. 그러니 일부러 길을 잃는 것도 괜찮다.

둘째, 걷기 제일 좋은 도시. 아니, 걸을 수밖에 없는 도시다.

버스도 지하철도 타보긴 했지만 로마는 누가 뭐래도 걷는 도시. 저명한 건축가 유현준 교수에 따르면 "로마의 도로망에서 한 블록의 크기는 평균 가로 80미터, 세로 70미터라고 한다. 반면 뉴욕의 한 블록 크기는 평균 가로 250미터, 세로 60미터고 서울 강남은 가로 800미터, 세로 800미터". (유현준, <어디서 살 것인가> 인용)

로마 한 블록을 시속 4km로 걸으면 약 72초가 걸린다. 뉴욕의 경우 시속 20km 마차로 이쪽 사거리에서 저쪽 사거리까지 이동하면 45, 강남의 경우 시속 60km의 자동차로 한 블록을 통과하는데 48초가 걸린다고 한다. 시간으로 계산하면 모두 한 블록을 통과하는데 대체로 1분 내외. 뉴욕은 마차 타는 도시, 강남은 차타는 도시, 로마는 걷는 용으로 설계됐다는 뜻이다.

로마 가서 관광을 하다보면 이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바티칸 시국을 보는 방법은 걷는 것뿐이다. 최소 3-4시간 이상을 계속 걸어야한다. 포로로마노도 콜로세움도 그렇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시기에 만들어진 도시라 어쩔 수 없다.

사지만 멀쩡하다면 길을 잃은 채 걸으며 여기저기 돌아보기 좋은 도시이지만 동시에 몸 관리를 잘해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실제 평발 소유자인 나의 경우 바티칸-포로로마노+콜로세움 연타를 맞아 다리와 허리가 아파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셋째, 세상의 관광객이 모두 모인 도시다. 관광객이 진짜 조오오오오오오오온나게 많다. 많은 나라를 가본 건 아니지만 내가 가본 어떤 도시보다 관광객이 많았다.

이는 강력한 장점이자 강력한 단점이다. 관광객이 많다는 건 관광지와 비관광지의 구별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딜 가나 영어가 잘 통하고, 고개를 돌리면 한국인을 찾기도 쉬워서 관광하기 편하고, 심지어 무슨 일이 생길 때 도움받기도 편하다는 건 장점.

그러나 사람이 질려 여행 온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에게 질리는 안 좋은 기억을 남길 수 있다. 특히 관광지 인근 식당은 별점이 높아도 대체 믿을 수가 없는 경우가 있어 맛없는 이탈리아 식당이라는 마치 형용모순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현지인이 하는 식당을 찾아본다거나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건 이후 여행기에서 소개하겠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로마에 들른 후 로마를 그야말로 큰 학교라 불렀다. 겨우 8일 머물렀던 나한테도 그랬던 것 같다. 때론 길을 잃어야 길을 찾을 수 있음을, 때론 천천히 걸어야만 더 자세히 볼 수 있음을 알려준 학교. 그 로마에 대한 본격적인 여행 이야기는 다음 편부터 시작하겠다.

▶다음 편 : <나보나광장과 판테온을 정처 없이 헤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