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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이탈리아 여행기

2024 로마 여행기 ⑤ 옳게 된 파스타와 30유로의 행복

오전 시간을 할애한 포로로마노와 콜로세움 투어를 마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점심 먹을 만한 식당을 구글지도로 여기저기 찍어놓았으나 역시 관광지라 그런지 미리 찍어놓은 식당들이 전부 웨이팅 중이었다.

더는 허기를 참을 수 없었기에 웨이팅이 없는(그나마 이 식당도 딱 한 자리 남아 있었다.)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오늘 오후 7시에 식당 한 곳을 예약해 두었기에 저녁을 맛있게 먹기 위해 점심은 허기를 달랠 정도로 간단히 먹기로 했다.

그래서 입맛을 돋울 전채요리로 로마식 주먹밥 수플리를 하나 시키고, 메인 요리로 카치오페페를 주문했다. (어제 먹은 건 카치오페페로 인정할 수 없어...) 그런데 막상 카치오페페가 좀 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를 대비하고자 포카치아 빵도 하나 시켰다. (흔한 돼지들의 변명)

음식을 기다리는 데 친절한 종업원이 와서 마실 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 식전주 아페롤 스프리츠를 한 잔 달라고 했더니 퍼펙트라고 답해주었다. (혼자 와서 이 정도로 시키니 너 입장에선 당연히 퍼펙트겠지.) 목이 마를 것 같아 물도 하나 시켰다

식전주 아페롤 스프리츠

이탈리아에서 물을 주문할 땐 ‘아쿠아’를 달라고 하면 된다. 여타 유럽 식당이 그렇듯 이탈리아에선 물이 공짜가 아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꼭 물을 시킬 때 꼭 내츄럴인지 스파클링인지 되묻는다. 일반적인 물을 원하면 그냥 내츄럴, 탄산을 원하면 스파클링을 시키면 된다.

식전주를 마시고 있을 때 차례대로 음식들이 나왔다. 로마식 수플리로 허기를 달래자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빵 포카치아가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메인 요리인 카치오페페 등장.

로마식 주먹밥 수플리
포카치아. 고대부터 로마 사람들이 화덕에 구워먹던 빵으로 알려져 있다.
카치오페페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로 유명해진 이탈리아 셰프 파블리는 카치오페페를 모든 이탈리아 파스타의 엄마 파스타라고 표현했다.

출처 : 파브리 유튜브

로마에서 자주 먹는 카치오페페는 토마토를 식재료로 쓰기 전부터(혹은 토마토가 전래되기 전부터) 먹었던 파스타의 근본이다. ‘카치오cacio’는 치즈, 페페pepe는 후추, 즉 치즈와 후추가 들어갔다는 뜻이다. 여기에 관찰레가 들어가면 그리치아, 여기에 계란을 더하면 그 유명한 카르보나라가, 계란 대신 토마토를 넣으면 아마트리치아나가 된다.

어디서 카치오페페는 생크림이 들어가지 않아 빨리 식으니 나오자마자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허겁지겁 흡입했다. (빨리 쳐 먹는 핑계도 가지가지) 어제 먹은 최악의 파스타와 달리 꽤 괜찮은 맛이었다. 조금 짜긴 했지만 선견지명을 발동해서 시킨 포카치아를 소스에 발라먹자 간이 딱 맞았다

다시 밝히지만 간단한 점심이다.

이날 점심값은 스프리츠 8유로, 수플리 3유로, 카치오페페 13유로, 포카치오 7유로, 3.5유로. 도합 37.5유로였다. 하지만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기에 만족한 점심이었다.

이쯤해서 막간 상식으로 이탈리아에서의 맛 표현에 대해 알아보자. 이탈리아에서 맛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표현은 부오노buono라고 한다. x나 맛있다는 말은 부오니씨모Buonissimo라고 한다. 한국말로 직역하면 이거 미친놈인데?’ 정도가 되겠다. 델리치오소라는 표현도 부오노를 대체할 비슷하지만 다른 표현으로 사용한다.

음식, 식당 = 미친x(극찬)

그 외에도 이탈리아인들은 델리카토라는 말도 맛있다는 뜻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탈리아 출신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는 이 표현에 대해 사용된 재료가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뤄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는 품격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알베르토 몬디, <지극히 사적인 이탈리아> 참조)

맛에 있어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이탈리아인들의 철학이 담긴 재밌는 표현이라 한 번 소개해 봤다. 한국에서 밈이 된 이탈리아인들이 파인애플 피자를 싫어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산도가 높은 토마토 베이스 피자에 산도가 높은 파인애플이 얹어지는 건 맛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린다고 생각하기에 싫어하는 것이다. (파인애플 넣을 거면 토마토 빼라는 뜻)

이탈리아인을 고문하는 방법(당연히 합성이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오후 일정을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식사를 마치고 바로 인근의 캄피돌리오 언덕과 베네치아 광장, 조국의 계단 등을 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지 못해 배터리가 떨어져 가고 있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지도를 보고도 길을 잃는 치명적 길치였기에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는 순간 국제 미아로 전락할 게 명백했다.

그래서 잠시 카페에 들러 충전을 하기로 하고 인근 커피숍들을 해매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충전할 수 있는 커피숍이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때부터 약 1시간 가량의 충전 찾아 삼만리가 시작됐다.

베네치아광장과 베네치아 궁전, 결국 보긴 했다. 길을 헤매던 끝에. 여기도 공사중이라 엄청 혼잡하다.
젠장 또 오벨리스크야, 이러면 난 또 이집트를 숭배할 수밖에 없잖아 (몬테치토리오 궁전 앞)

다리도 아프고 배터리가 점점 소멸 되어가던 와중, 결국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에 가기로 결단을 내렸다. 한국에선 발에 채이는 게 스타벅스지만 로마에서는 스타벅스가 진짜 몇 군데 없다. 가장 가까운 나보나광장-판테온 쪽 스타벅스에 도착해 충전을 시작하는 순간 마음이 안정됐다. (믿고 있었다고...갓타벅스) 스타벅스지만 여긴 이탈리아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같은 건 없다! 아이스 커피 마시고 싶으면 '콜드브루'를 주문하면 된다.

여기 스타벅스에선 이름을 물어보고 컵에다 이름을 적어준다.

충전은 완료됐지만 이미 동선이 개 같이 꼬여서 결국 캄피돌리오언덕 루트는 다른 날 가기로 했다. 하지만 길을 잃어도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로마 아니던가. 어디를 갈지 뇌내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중에 지난 일요일에 가려다 허탕을 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이 떠올랐다.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은 이탈리아의 광인 화가 카라바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꼭 가봐야 할 성당이다. 예배당에 카라바조의 작품인 소위 마태오 3부작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내부.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내부.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내부.
여기도 공사 중이다.

이놈의 성당도 희년 때문인지 공사 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카라바조의 마태오 3부작작품은 떼서 따로 바닥에 전시돼 있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대충 방치되 있어서 모작인가 싶었다. (맘만 먹으면 들고 튈 수 있을 것 같았다.)

성 마태오의 소명 (또는 마태의 부름)
성 마태오와 천사
성 마태오의 순교

성당 감상을 마치고 나와 길 잃은 들개마냥 주변을 돌아다니며 동네 구경을 시작했다. 기념품이라도 살까 싶어 상점을 돌아다녔다. 사실 바티칸에서 가디건을 잃어버린 뒤로 추워서 겉옷을 사고 싶었는데 그놈의 ‘I love roma’ 시리밖에 안 보여서 사질 못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유엔협약에  ‘I love xxx’ 티셔츠 폐지 조치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걸 입고 로마를 돌아다니는 건 '날 소매치기 해주세요'라는 뜻 아니겠는가?
길 가다 구경한 마켓. 작은 상점인데도 와인이 이것저것 있었다.
로마에서 꽤 커보이는 서점도 구경했다.
로마 서점
비 오는 캄포데피오리

정신없이 돌아다보니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왔다. 로마에 와서 처음으로 식당 예약이란 걸 해보았는데, 내가 예약한 식당은 Trattoria Der Pallaro라는 이름의 로마식 가정식 식당이었다. 어제의 식사 실패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유튜브에서 열나게 검색해서 찾은 식당이다. 사장님과 종업원들이 영어를 못한다는 리뷰를 보고 오히려 신뢰가 가서 선택헸다. (내가 갔을 땐 한국인이 나밖에 없었다.)

식당 외부
식당 내부

사장과 종업원이 영어를 못하니 주문이 어렵지 않을지 걱정할 필요가 1도 없다. 여기서 손님이 선택해야 할 것은 와인이 화이트인지 레드인지그리고 물이 내츄럴인지 스파클링인지 딱 두 가지뿐이다. 메뉴판도 없다. 자리에 앉으면 사장님이 알아서 전채요리-탄수화물(파스타)-단백질(고기)-후식 순으로 갖다주신다.

가장 먼저 갖다준 하우스와인.  화이트와인을 시켰는데 맛있었다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전채요리가 나왔다. 빵과 렌틸콩에 토마토, 모짜렐라치즈와 프로슈트까지. 렌틸콩도 진짜 맛있어서 싹싹 긁어먹었고(뭔들 안 그랬겠냐) 모짜렐라 치즈랑 프로슈토도 너무 맛있어서 빵에다 찍어서 싹 설거지했다.

전채요리로 나온 렌틸콩과 토마토, 빵과 모짜렐라치즈와 프로슈트

이후 또 다른 전채요리로 미트볼과 라이스볼이 나왔다. 얼핏 보고 수플리인가 싶어 물어봤는데 종업원이 어떤 요리인지 설명해 주었다. 이어 메인요리인 파스타가 나왔다. 파스타가 짜다는 리뷰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론 입맛에 잘 맞았다.

미트볼과 라이스볼
메인 요리인 파스타

이어 두 번째 메인 요리로 감자칩, 송아지 고기, 볶은 야채요리가 나왔다. 다른 음식에선 못 느꼈는데 볶은 야채요리를 먹고 나서 음식이 짜다는 리뷰가 무슨 뜻이었는지 조금 이해했다. 이어 후식으로 케이크에 복숭아 음료수까지 나와 배를 가득 채웠다. 

볶은 야채요리, 감자칩, 송아지고기.
케이크와 복숭아 음료수

1시간이 넘는 동안, 천천히 음식을 갖다줘서 로마에 와서 가장 여유 있게 식사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밖에선 벼락이 치고 비가 열댓 번은 멈췄다 다시 내렸다를 반복했다. 빗소리를 bgm삼아 여유있게 즐긴 식사 값은 30유로.

30유로의 행복을 누리고 로마 온 이래 가장 늦은 시간 숙소로 귀환했다. 투어 없이 조금 한가롭게 시작한 다음날의 조금 여유로운 일정은 다음 편에서!

다음 편 : <제국의 탄생과 끝을 함께 거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