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5일 일요일, 로마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전날 밤 정신없이 도착한 숙소는 ‘My Rhome Prati’란 곳이었다. 흔히 로마에 오는 한국 관광객들은 교통의 편의성을 위해 1)테르미니역 인근 혹은 관광의 편의성을 위해 2)트레비분수 근처에 숙소를 잡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두 가지 선택지를 과감히 제외했다. 테르미니역이나 트레비분수 근처는 관광객 밀집 지역이라 지나치게 번잡스럽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몰린 핫플인 탓에 (내 기준에서는) 숙소 비용도 정말 말도 말도 안 되게 비쌌다. (사람 많은 것도 싫은데 돈까지 마니 내라니?)
이 말도 안 되는 비용이 관광객 밀집 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아주 합리적으로 내려간다. 관광객들이 적어 저녁에 매우 편안~하다는 점도 나 같은 i에게는 큰 장점. 물론 이건 취향 차이다.
교통 편의성에 대해 걱정할 수 있지만 조금만 일찍 일어날 각오를 한다면 큰 문제는 없다. 내가 머문 숙소 바로 옆의 lepanto역은 테르미니역에서 지하철로 4정거장밖에 안 떨어져 있었고, 대부분 관광지를 걸어서 혹은 버스/지하철로 다닐 수 있기에 큰 문제도 없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아침을 집 근처 카페에서 카푸치노와 코르넷또로 시작했다. 이 조합은 말 그대로 이탈리아에선 '국롤'이다. (집 근처 카페 :Caffè Vergnano1882 Prati cola di rienzo)
카푸치노는 흔히 이탈리아인들이 12시 전에 먹는 커피고, 코르넷또는 이탈리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빵으로 주로 아침에 먹는다. 피스타치오가 들어간 코르넷또로 배를 채우며 오늘 아침 계획을 세웠다. (물론 메모는 안하고 뇌내 상상으로..)
이전 여행기에서 소개했듯 스페인광장 – 보르게세미술관을 가려던 계획은 보르게세 미술관 예약 실패로 일찌감치 어그러졌다. 지도를 보며 열심히 짱구를 굴리다 선택한 곳은 나보나광장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로마 여행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볼 게 너무 많아서 동선 짜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로마 2,000년의 역사 안에 답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로마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묻는다면 나는 “언덕에서 시작한 왕국, 광장으로 거듭난 공화국, 길로 뻗어나간 제국”이라고 답할 것이다.
로마의 시조는 늑대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로물루스 레무스 형제다. 나라의 거점을 팔라타노 언덕으로 할 것이냐 아벤티노 언덕으로 할 것이냐를 두고 싸우던 두 형제 중 로물루스가 승리하였기에 로마는 팔라티노 언덕에 자리 잡았고, 이후 7개 언덕으로 뻗어 나갔다. 초창기 로마는 국력이 약해 주변의 침략을 막아내는 게 제1과제였기에 방어가 유리한 언덕을 선택했다.
로마가 점차 자리 잡으면서 이후 발달한 것이 광장이다. 로마인들이 세운 도시 대부분은 십자로 중앙에 직사각형의 광장이 하나 있고, 신전이나 성당, 공공건물(혹은 현대의 박물관 등)이 광장을 둘러싼 모습을 갖추고 있다. 로마 시민들이 모여 토론도 하고 밥도 먹고 문화 생활을 즐기는 공간으로서 광장은 로마 공화정의 상징 같은 곳이 되었다.
이 다양한 광장이 로마 여행에서도 거점이 된다. 예컨대 나보나 광장을 거점으로 삼으면 주변의 판테온, 트레비분수 등을 걸어서 구경할 수 있고 스페인광장을 거점 삼아 보르게세 미술관까지, 베네치아광장에서 시작해 포로로마노-콜로세움으로 쭉 이동할 수 있다.
아무튼 기분 내키는 대로 오늘은 나보나 광장을 향해 걸었다. 나보나 광장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만든 운동장이 있던 곳에 세워진 광장으로, 경기장 관중석 계단이 있던 자리에 광장을 빙 둘러싼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로마인들은 과거 이 공터를 ‘캄푸스 아고니스’라 불렀는데 그리스어 아곤agon은 운동경기, 노래, 시 등의 경연(gara)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 말이 나중에 변형되어 나고네Nagone, 나오네Naone, 나보나Navona로 바뀌었다고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에 도착한 순간 아뿔싸! 내가 목격한 것은 나보나 광장 곳곳을 둘러싼 공사판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2025년, 내년이 희년이라는 것이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를 가리키는 ‘희년’이 오면 로마에 순례자들이 몰려들고, 시 차원에서도 큰 행사들이 있다. 그래서 로마 곳곳이 공사판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나보나 광장 뿐 아니라 로마 곳곳이 공사판이었다. 각종 유적들이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공사판 로마’가 일반 로마보다 오히려 희귀하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고 (이딴 게 럭키비키?) 다시 열심히 돌아다니기로 했다.
나보나 광장을 둘러본 후 로마에 오면 꼭 가야 할 만신전, 판테온Pantheon으로 향했다. 그런데 또다시 아뿔싸, 판테온은 오픈런하려는 관광객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황급히 검색 해보니 사람이 워낙 많아 예약하고 오는 게 좋다고 한다.
판테온 다음으로 가려고 했던 근처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으로 향했지만 여기도 10시 반 오픈이라 실패. 실패의 연속이었으나 로마에서는 그래서도 괜찮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볼 게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근처에 있던 아무 성당에 마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인근의 산티냐치오 교회를 시작으로 심지어 아직도 이름 모를 무명의 성당 한곳을 더 돌아다니고 나니 다시 판테온 생각이 났다.
오전 10시쯤 판테온에 가보니 어느새 가득하던 관광객 줄이 싹 빠져 있었다. (판테온에도 ‘오픈빨’이 있었단 말인가?) 덕분에 줄도 서지 않고 입장료 5유로를 내고 바로 입장했다.
판테온은 널리 알려져 있듯 그리스어로 만신전이란 뜻이다. (모든(Pan) + 신전(theon))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는데, 바티칸으로 대표되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던 다신교 시절의 로마를 상징한다.
판테온 내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꼭대기의 돔이다. 판테온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돔 형태의 건축물로, 돔 천장 중앙의 작은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정말 신들도 보고 감탄했을 정도로 일품이다. 비가 오면 이 창을 통해 빗물이 쏟아지는 광경이 또 기가 막혀서, 흔히 ‘비오는 날에는 판테온을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판테온은 후세에 지어진 수많은 건축물에 정말 말도 안 되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수많은 우라까이를 생산해 냈다는 점에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정도가 아니면 비벼볼 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다.
한참 감탄하며 판테온 내부를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신부님들이 나타나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전이라도 넣어줘야 하는 걸까 싶은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며 주위의 눈치를 살피다가 '판테온 버스킹'이 아닌 잠시 뒤 열릴 미사 연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래 연습이 끝나자 신부님이 앞에 나와 ‘미사를 시작할 것이니 미사 때문에 온 분들이 아니면 나가달라’고 말했다. 얼른 개종할까 아주 잠시 고민하다 밖으로 나왔다.
명색이 만신전이었던 판테온이지만 7세기 이후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만신전과 성당이라는 모순된 위치를 모두 받아들이며 지금까지 버텨온 판테온이 새삼 대단해보였다.
성공적인 판테온 관람을 마치고 향한 곳은 아까 오픈런에 실패한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이었다. 이 성당은 프랑스에선 흔한 고딕 양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로마 성당이라 알려져 있다. 성당 내부는 큰 편이었지만 외부인 출입 금지 구간이 많아서 생각보다 볼 게 많지는 않았다.
판테온에서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으로 가는 방법은 매우 쉽다. 판테온 바로 뒤편으로 가면 다소 커여운 코끼리 오벨리스크를 바로 발견할 수 있다. 그 코벨리스크 바로 앞에 있는 성당이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이다.
아침 여섯시부터 부산스럽게 일어나 돌아다녔더니 이제 슬슬 다리도 아프고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성스러운 마음으로 로마에서의 진정한 첫 식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로마에서 식당 찾는 법과 오후 포폴로 광장, 스페인 광장, 트레비분수 일정은 다음 편에서!
▶다음 편 : <모든 길은 로마로, 로마 길은 포폴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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