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로마에 처음 오는 사람이 로마에 와서 딱 하나만 보고 집에 가야한다면, 혹은 갑작스런 이유로 로마에서 딱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면 어디로 향해야 할까?
많은 이름들이 머리를 스쳐가지만 그럼에도 아마 ‘콜로세움’을 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적, 혹은 유물과 마주한다는 건 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일이다.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흔적만으로 과거와 대화하는 일이기에 아무리 대단하고 오래된 유적지라도 얼핏 보면 그냥 돌무덤, 깨진 항아리에 불과한 경우가 다반사이다.
바꿔 말하면 그 시절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직관적인 감흥을 주는 유적이나 유물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는 뜻이다. 아마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병마총을 보면 그런 느낌을 받을 텐데, 콜로세움도 비슷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랬기에 9월 17일 투어는 매우 의미 깊은 날이었다. 아주 상반된 두 개의 유적지를 함께 보러 나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잘 모르고 보면 그냥 돌무더기처럼 보일지 모를 '포로 로마노', 그리고 그 누가 와서 봐도 잘 모르지만 웅장하다는 인상을 받을 만한 콜로세움. 그 명성대로 콜로세움이 익숙하지만 강한 감흥을 줄 것인가, 아니면 알고 보는 포로 로마노가 낯설지만 깊은 감흥을 줄 것인가?
포로 로마노 옆에 바로 콜로세움이 붙어 있기 때문에 두 개를 묶은 투어프로그램들이 있었다. 나는 ‘마이리얼트립’이라는 앱을 통해 포로 로마노 + 콜로세움 한국어 투어를 신청했다.
투어를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카푸치노와 코르넷또로 상쾌한 아침을 시작했다. 미팅 장소는 콜로세움 근처였는데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오늘은 (내 허리와 다리를 아낄 겸) 버스를 타보기로 했다.
로마에선 여행객을 위한 버스 표와 지하철 표가 통합 운영되고 있다. 버스 정류장 앞이나 지하철역 안에 티켓 머신을 찾아 거기서 상황에 맞게 1회권, 24시간 이용권 등을 구입하면 된다. (작은 버스 정류장은 티켓 머신이 없는 경우도 있으니 상황에 따라 미리 끊어두는 것을 추천한다.)
한 가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을 공유하자면 이탈리아 버스에선 표 검사 같은 건 없다. 시칠리아에서도 로마에서도 공통적으로 경험한 일이니 국롤이 아닌가 싶다. 일본처럼 버스에서 내릴 때 돈을 내는 시스템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알아서 버스 안에 있는 기계에 표를 찍는데 안 찍는 사람이 대다수고 안 찍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한다. 버스기사들은 늘 꾸불꾸불 차로 다니기 불편한 로마의 도시를 운전하는 데 정신이 팔려 보였다.
그래서 처음엔 이탈리아에서 무상교통이 실현된 줄 알았다.(관광객들만 표 사고 국민들은 그냥 타는 건가?) 하지만 그냥 자체적인 무상교통이었다는 것..하지만 절대 무임승차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니 혹시나 오해 없길 바란다. '2유로 아꼈네, 개이득!'이라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검사원이 튀어나와 100배를 물어내라고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걸리는 순간 100배가 터지는 가챠 버스게임)
버스에서 내린 뒤에는 따로 미팅 장소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다리 밑에 포로 로마노가 펼쳐져 있었고, 건너편에 바로 콜로세움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홀린 듯 다리 위에서 포로 로마노를 감상하며 걸어가자 자연스럽게 가이드를 만날 미팅 장소에 도착했다.
바티칸이 중세 로마의 정수라면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고대 로마의 정수라 할 수 있다. 팔라티노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포로 로마노야말로 로마의 진정한 도읍지였다.
(역사왜곡을 각오하고)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여행기 1편에서 설명했듯 국력이 약했던 로마는 방어를 위해 언덕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로마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언덕만으로는 늘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로마의 시조인 로물루스는 비만 오면 물이 고이던 습지였던 곳에 흙을 메워 백성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했다.
로물루스는 이곳을 ‘포룸forum’이라 불렀는데, 직역하면 ‘바깥’ ‘장외’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비유하자면 ‘사대문 밖’ 정도가 아닐까 싶다.
로마가 여러 언덕으로 확장되면서(실제 캄피돌리오언덕이 포로로마노 바로 근처에 있다.) 포룸은 주변 언덕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역(물물교환)을 하거나 함께 문화, 종교 행사를 치르는 곳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포로로마노에 자연스레 각종 신전이 많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습지를 흙으로 메웠어도 물난리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영화 <기생충> 한 장면처럼, 언덕 아래 습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폭우는 재앙 그 자체였을 것이다.
로마 토박이가 아닌 에트루리아에서 온 제5대 로마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집권하고 나서야 이 문제가 해결됐다. 당시 로마보다 선진국이었던 에트루리아에서 건축가, 공학자,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포룸에 배수 시설을 설치하고, 고인 물을 테베레 강으로 빠지게 만든 뒤 그 위에 돌로 도로를 만들었다. 오늘날로 치면 달동네 재개발 사업에 성공한 것. 그 뒤 포로 로마노는 장군들의 개선식, 공공 연설, 선거 유세, 황제의 대관식이 진행되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거듭난다.
인간의 힘으로 폭우를 극복해낸 로마의 역사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이날도 비가 쏟아졌다. 가이드에 따르면 로마에선 강수 확률이 70% 이상이면 무조건 비가 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요즘 한국 날씨처럼 계속 비가 왔다 그쳤다를 반복했는데, 그 덕분일지 포로로마노엔 방문객이 적었다. (오히려 좋아)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포로 로마노의 주요 유적지들을 따라 걸었다. 이제는 흔적 밖에 남지 않은 카이사르 신전부터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 신전,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와 풀룩스에게 바쳐진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베스타 여신을 모시던 베스타 신전, 이후에 성당으로 쓰였다는 안토니우스 파우스티나 신전 등.
하지만 포로 로마노의 진정한 위용은 포로 로마노 안에서는 볼 수 없다. 이게 베스타 신전이래, 여기에 카이사르 신전이 있었대, 이건 쌍둥이 신전이래, 정신없이 설명을 따라 시선을 돌리기 바쁘다. 포로 로마노의 웅장함은 팔라티노 언덕 위에 올라서야 그 자태를 드러낸다.
팔라티노 언덕 위에서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면 비로소 이곳이 왜 ‘세상의 배꼽’이라 불리는 지 이해할 수 있다. 아마 당대의 로마인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포로 로마노 안에서 일상을 정신없이 살아갈 때는 내가 사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언덕에 올라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사는 포룸이 한 눈에 들어왔을 때 새삼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바로 이곳이 ‘로마’임을 말이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포로 로마노를 만끽한 뒤 가이드와 함께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비너스와 로마 신전을 들러 '콜로세움 뷰'를 감상한 뒤, 본격적인 콜로세움 입장을 준비했다.
다소 한적했던 포로 로마노와는 달리 콜로세움에는 사람들이 아주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입장료는 포로 로마노 + 콜로세움 통합 티켓으로 27유로를 지불했는데, 가이드로부터 표를 받은 후 콜로세움에 들어가는 동안 표 검사를 세 번이나 했다. 여권까지 보여달라며(콜로세움 갈 때는 여권이 필수다.) 본인 확인까지 거친다. 암표상들이 득실거려서 콜로세움 티켓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바람에 사재기를 못하게 하려고 본인 확인 절차가 엄격해졌다고 한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콜로세움은 로마 시민들이 검투사 경기, 서커스 관람 등을 즐기던 원형극장으로 현대의 모든 극장과 경기장의 시조새, 근본 of 근본인 건축물이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지어진, 말 그대로 그 당시 건축기술이 총 집약된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로마식 콘크리트'까지 사용되어 지금도 무너지지 않은 채 단단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당시 콘크리트의 재료는 화산재로 지금 콘크리트와는 다르다.) 총 76개의 출입구를 통해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20분 만에 퇴장이 가능할 수 있을 정도로, 또 비나 눈, 더울 때는 장막을 쳐서 천장 부분을 가릴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됐다.
콜로세움의 특별함은 이것이 신을 숭배하거나 황제/왕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로마 대화재 이후 민심이 흉흉하던 시기 유명한 폭군 황제 네로가 암살당하고, 그 다음 황제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만든 것이 콜로세움이다. 네로가 지으려 했던 황금궁전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원형경기장을 세우고 시민들을 위한 검투경기, 서커스 같은 콘텐츠를 가득 채운 것이다. 실제 네로가 궁전에 세우려 했던 '황금거상'(콜로세오 디 네로)에서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이 유래됐다.
한 마디로 황제나 즐길 수 있던 오락을 시민 모두에게 돌려주겠다는 일종의 '시민 복지'의 결과물이 콜로세움이다. 그 복지가 빵을 나누어주거나 집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문화생활(사람들이 서로 죽이거나 맹수들이 사람을 뜯어먹는..)이었다는 점도 놀랍다. 경기장 안에 물까지 넣고 빼며 '모의 해상전투'까지 진행될 정도로 로마인들은 오락에 진심이었다. 이처럼 왕과 신이 아닌 시민을 위해 최첨단 기술과 문화를 총동원할 수 있었던 나라가 바로 제국 로마였다. (그래서 망했나?)
가이드 투어는 콜로세움 내부에서 종료됐다. 이제 투어를 마쳤으니 로마 마니아들에게 돌 맞을 만한 심경을 한 번 밝혀볼까. 콜로세움, 솔직히 시시했다. (내가 두 번째 콜로세움을 보러 온 것임을 감안해서 들어주시길) 정확히는 포로 로마노에 비하면 그랬다는 뜻이다.
돌덩이로 남은 수천년 제국의 역사(포로로마노) VS 수천년 역사로 남은 수많은 돌덩이(콜로세움). 비유하자면 이런 느낌이랄까. 포로 로마노를 거닐었을 땐 천년제국 로마를 건설한 로마 시민들의 삶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깨져버린 신전, 터밖에 남아 있지 않는 유적지는 오히려 사라진 공백을 현대인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도록 이끌어낸다.
작은 습지에 터 잡아 나라의 기틀을 다졌을 고대 로마인들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마침내 폭우를 극복하고 길을 다지고 도시를 건설했을 때 로마인들은 어떤 성취감을 느꼈을까. 언덕 위에 올라 점점 완성되어 가는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는 로마인들의 꿈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반면 콜로세움은 위대한 건축물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온전하였고, 그래서 지나치게 예측가능했으며 그래서 삶의 향기가 나지 않았다.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을 함께 다녀오며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내가 사랑하는 건 어떤 웅장한 유적지보다 그 안에 담긴 인간들의 삶과 그 세월의 흔적이라는 것을.
진또배기 로마식 식사를 맛본 9월 17일 오후 일정은 다음 편에서!
▶다음 편 : <옳게 된 파스타와 30유로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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