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바티칸 투어의 아침이 밝았다. 왠지 모를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시차적응 때문일지 새벽 같이 일어났다.
바티칸 시국은 로마 안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로마를 들른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봐야 할 대표적인 관광지다.(사람이 조오오오온나게 많다는 뜻이다.) 교황이 국가원수로 있는 초미니국가이지만 엄연히 국가인 만큼 어디 동네 마실 가듯이 왔다 갔다 할 수 없고 입장이 엄격히 통제된다. 그래서 투어로 가는 것이 좋다.
투어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바티칸 투어는 한국인들이 개척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현지에 수많은 한국인 투어(즉 한글 투어)가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 ‘줌줌투어’라는 앱을 통해 투어를 예약했는데 그 외에도 마이리얼트립, 갯유어가이드 등 투어 프로그램이 굉장히 많으니 취향과 일정에 맞게 투어를 예약하면 된다. 참고로 16년 전 로마에 왔을 때 바티칸투어를 해본 적이 있는데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라떼는 앱 같은 거 없었는데..(라떼 민박집에 있는 전단지 보고 연락하거나 숙소에 같이 있는 사람들 모아서 사람 수 맞으면 같이 투어하고 그랬어!)
집합 시간은 오전 6시 반,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Ottaviano역 앞 ‘레몬글라스 젤라또’라는 곳이 집합 장소였다. 일찍 나간다고 6시15분까지 갔는데도 이미 의지의 한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거의 가족 단위 아님 연인 친구 단위였고 혼자 온 사람은 나뿐.
가이드 선생님의 빠른 지도 편달에 따라 약 15명 정도가 모여 다 같이 바티칸박물관으로 향했다. 신청한 사람이 안 오거나 해서 사람 수가 모자랄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각 지에서 모인 가이드들이 알아서 자기들끼리 논의해서 사람 분배해서 맞춰서 팀을 꾸린다.
그렇게 7시가 안 되어 바로 출발~했지만 일찍 간다고 빨리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바티칸시국의 입구에 있는 바티칸박물관은 9시에 입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티칸은 참고로 일요일엔 휴무, 내가 갔던 월요일부터는 추석. 한마디로 ‘대목’이자 ‘제철’이기에 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무려 2시간 이상 웨이팅 끝에 입장할 수 있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피곤하고 다리 아프기 시작)
참고로 바티칸박물관 옆의 커피숍에서는 무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팔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찾을 수 없다는, 아니 찾아선 안 된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미국인들이 자꾸 커피숍에 와서 차가운 커피를 찾아서 이탈리아인들이 짜증나는 어투로 ‘야 또 미국인 왔다!’라고 말하기 시작한 데서 유래됐다는 아메리카노(저 아메리칸 또 왔노!). 나는 가보지 않았지만 그 커피숍에 가면 ‘카푸치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렇게 물어본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하도 아아를 찾아서 생겨났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커피도 한잔 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가이드가 바티칸 시국 피피티를 시작했다. 바티칸의 역사부터 우리가 탐방할 곳의 구조, 그리고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에 대한 그림 설명까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바티칸을 흔히 그냥 로마 덕에 대충 나라인척 코스프레하는 ‘유사 나라’ 정도로 생각하지만 엄연히 있을 건 다 있다고 한다. 심지어 안에 공항도 있다고. (사실 공항은 아니고 교황님 헬기 타는 곳이지만). 국방력 빼곤 나름 갖출 순 다 갖췄다고.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바티칸’이란 이름은 시인, 예언자 등을 뜻하는 라틴어 바테스vates에서 파생됐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고대 로마 시절 이런 음유시인들이 테베레강 건너편에 있던 ‘바테스의 언덕’에 살고 있었기에 이 지역이 바티칸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아쉬웠던 점은 앞에서 말했던 대로 내년이 희년이라 이곳 바티칸도 공사가 많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베드로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품인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도 볼 수 없었다.
아무튼 2시간의 기다림 끝에 바티칸박물관으로 입장했다. 입장료는 성인 23유로. 1층 매표소에 매표 머신이 고장 나서 마비가 되는 바람에 일정이 더욱 딜레이 됐다고 한다.
이쯤에서 바티칸을 가실 모든 분들께 경고 한 마디 해야겠다. 오랜 시간을 들여 들어왔으니 이제 좀 여유 있게 미술품을 감상해볼까 싶은 낭만, 여기선 실현 절대 불가능하다.
쉴 새 없이 앞으로 걸어가지 않으면 가이드를 잃어버리거나 미아가 되기 십상일 정도로 관광객이 미어터지기 때문이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바티칸의 위대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황이 되는 것뿐이다. 내가 쉴 새 없이 걸었던 루트는 아래와 같다.
“회화관 → 솔방울 정원 → 팔각 정원 (라오콘) → 동물의 방 → 뮤즈의 방(토르소) → 원형의 방 → 그리스십자의 방 → 촛대의 방 → 아라찌의 방 → 지도의 방 → 소비에스키의 방 → 성모마리아의 방 → 라파엘로의 방 (아테네 학당) → 근현대미술관 →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화, 최후의 심판)”
위에 첨부한 사진들처럼, 정해진 루트를 따라 끊임없이 걸었다.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은 하는데 사실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걸어가야 한다. 즉 3-4시간을 쉴 새 없이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잠시 사람이 좀 비었다 싶은 곳에 잠시 서서 설명을 듣고, 그 뒤로 계속 걸었다. 정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가 없다. 가이드에 따르면 앞에서 누가 멈추면 ‘don’t stop’이라고 외쳐도 된단다.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혼잡한 상황이라 오히려 안에는 소매치기도 없다고 한다. 내 생각에도 자기 돈 23유로나 투자해서, 그것도 새벽 여섯시에 2시간 넘게 줄 서서 기다려서 안에 들어와 소매치기할 만큼 멍청한 도둑은 없을 거 같다.
이쯤해서 바티칸 투어의 중간 결론을 한 번 내보겠다.
- 조용히 천천히 예술 작품을 즐기고 싶다면? -> 가지 마라
- 4시간 이상 계속 걷기 힘들 정도의 신체조건을 갖고 있다면? -> 가지 마라
그러나 유럽을 지배한 위대한 종교의 힘에 대해 마음껏 느껴보고 싶다면, 종교가 아니었다면 절대 이룰 수 없다는 위대한 예술의 힘을 목도하고 싶다면 꼭 한번쯤 가야할 곳이 바티칸이다.
바티칸을 둘러보며 느낀 감상을 한 마디로 설명하면 ‘대체 신이 뭐라고’였다. 대체 신이 뭐라고 인간을 이토록 위대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는 시스티나성당에 들어가면 이러한 생각이 더욱 강렬해진다. 그래서 괴테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보지 않고는 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가 없다”고 말했나보다.
전쟁 같았던 바티칸 박물관과 시스티나 성당 투어를 마치고 난 뒤의 종착지는 베드로 성당이었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장 18절). 초대 교황 베드로가 죽은 자리에 만들어진 세계 최고 규모의 성당이다. 바티칸의 중심부인 성 베드로 광장은 하늘에서 보면 천국의 문을 열 열쇠를 상징하듯 열쇠 구멍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우리의 바티칸 투어는 베드로 성당 앞까지였다. 베드로성당은 현재 여러 공사 중이라 들어가도 볼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한다. 내년은 희년이라 천국 가고 싶은 더 많은 사람이 모일 예정이라고 한다.(여기서 더? 물리적으로 가능?)
베드로성당 위에서 보는 경치가 일품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너무 오래 걸었는지 다리와 허리가 너무 아파서 그만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투어를 마치니 이미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두시가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와중에 걸치고 있던 가디건마저 홀라당 잃어버렸다. 허리에 묶어서 두르고 있었는 데 대체 어느 새 훌러덩 빠진 것인지.(누가 훔쳐간 건 아닐테니..)
가이드에게 추천받은 바티칸 근처의 식당들이 있었는데 가는 데마다 사람이 가득 차서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귀환을 선택했다. 그리고 집 근처 식당 중에 별점이 제일 높아서 미리 찍어놓았던 Fabric이라는 이름 식당으로 향했다. 잔뜩 기대하고 로마에 오면 꼭 먹어야하는 파스타 카치오 페페(cacio a pepe)와 또 다른 파스타 오레키에테를 시켰는데..(이 메뉴들은 대부분 실패가 없는 메뉴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와 씨발, 맛이 너무 없어서 한 입 먹고 깜짝 놀랐다. 내가 늦은 오후 3시쯤 간 탓에 요리사가 퇴근하고 다른 사람이 만들었나? 아니면 원래 맛이 없나? 싶을 정도로 너무 맛이..아니 내가 여태까지 먹어본 파스타 중에 제일 맛이 없었다. 일단 면이 부드럽지가 않고 딱딱한 느낌이 들 정도여서 먹다 남겼다.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내가 음식을 먹다 남기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비상사태인지를...)
이탈리아에 맛없는 파스타도 있다는 점을 깨닫고 충격에 빠져 얼른 귀가했다. 바티칸 투어의 육체적 피로함에 맛없는 파스타의 멘탈 충격이 겹쳐 잠시 늦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일어나보니 다시 나갈 기운이 1도 없어 주위 마트에 들러 와인을 좀 사고. 오늘 겪은 '맛없는 음식' 사태의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기로 한다.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 그리고 이제부터 맛있는 저녁만 먹기로 한 결심한 새로운 여정은 다음 편에서!
▶다음 편 : <돌은 역사가 되고 역사는 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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