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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이탈리아 여행기

2024 로마 여행기 마지막 편 : 로마는 로망이다

921일 토요일, 로마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로마에서의 7박이 지나고 서울로 귀환해야 하는 날. (아 집에 가기 싫어..)

체크아웃은 11시까지였지만 일찌감치 짐을 다 싸고 체크아웃을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테베레강 북서쪽에 숙소를 잡은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집주인도 친절하여 더욱 괜찮았던 숙소.

청소를 못해놓자 청소하는 사람이 내일 해줄 거라고 알려준 친절한 집주인

오늘은 저녁에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해서 테르미니역 근처에 짐을 맡겨놓고 주변을 돌아보는 간단한 일정이다. 숙소 바로 밑에 있는 커피숍에서 카푸치노와 코르넷또로 하루를 시작했다.

합쳐서  2.9 유로였던 카푸치노와 코르넷또. 그리울 거야 ...
그리울 거야 나의 숙소
그리울 거야 레판토역

레판토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테르미니역으로 향했다. 짐이 무거워서 테르미니역 수하물 보관소에서 짐을 맡겨놓고, 주변을 구경할 예정. 수하물 보관소 찾는 방법은 간단하다. 테르미니역에서 내려 ‘Deposito Bagagli’라는 표지판을 찾아 무작정 걸으면 된다. 나 같은 심각한 길치도 찾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하물 보관소 가는 길

수하물 보관소에는 짐을 맡기려는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카운터에선 몇 시까지 맡길 거냐면서 여권을 검사했다. 그래서 여권을 미리 꺼내뒀는데 왜인지(짐이 가방 하나밖에 없어서인지) 나한텐 몇 시까지 찾으러 올 것인지 묻지 않고 여권을 달라는 말도 안 했다.

테르미니역 수하물 보관소
수하물 보관 교환증
공항으로 가는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기차 표도 미리 끊어두었다 .  테르미니역으로 올 때는 왜인지 기차가 없어 기차표로 버스를 타고 왔는데 ,  이 날은 다행히도 파업이 없었나보다.

테르미니역에 짐을 맡긴 이유는 테르미니역 바로 근처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Basilica Papale di Santa Maria Maggiore에 가기 위해서다. 로마 4대 대성당 중 하나로, 로마에 오면 꼭 가봐야 할 명소다. 테르미니역 근처에 있다길래 일부러 돌아가는 날 일정으로 묵혀 두었다.

그 명성답게 로마에서 가본 성당 중에 가장 큰 규모에 속했다. 입장할 때 가방 검사하는 성당도 내 기억엔 처음이었다. 입장료는 없었고, 그럼에도 생각만큼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서(또 넓어서) 쾌적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입구
대성전 앞의 오벨리스크

이 성당의 이름인 마조레위대함’ ‘주요함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마조레 대성전이라면 사실 역전앞과 비슷한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대성전의 화려한 황금 천장 디자인은 건축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작품인데, 금은 나중에 입혀진 것이라고 한다 .

로마 귀족이었던 조반니 부부는 평소 자식이 없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눈 내리는 곳에 성당을 지으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부부가 교황 리베리오를 찾아가 꿈 이야기를 하자 교황도 같은 꿈을 꾸었다며 눈 내린 곳을 찾아다녔는데, 한 여름이던 85일에 언덕에 눈에 하얗게 내려 있었다는 것.

교황은 이를 기적이라 여기고 이곳 에스퀼리노 언덕에 성당을 지었다. 조반니 부부가 소원대로 자신을 낳았는지는 모르겠다. (마리아님 먹튀하신 건 아니시겠...)

성당 천장
성당 천장
성당 천장

이 대성전은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랑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 대성전을 찾아서 기도했는데, 자신이 선종하면 베드로 대성전이 아니라 이곳에 묻어달라고 했을 정도다.

출처  : cpbc이

이곳 마조레 대성전에는 중요한 유물이 하나 있다. 대성전의 중앙 제단은 네 개의 기둥과 덮개가 금으로 장식돼 있고, 이 뒤쪽의 반원형 천장에는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 모자이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 중앙 제단 아래로 내려가면...

중앙 제단 아래로 내려가면 아기 예수가 태어나 누웠다고 전해지는 물구유의 나무 조각이 유물함에 보관돼 있다. 그래서 이곳은 말구유 성모 성당이라고 불렸다고. 이 유물함 바로 앞에 무릎 꿇은 조각상의 주인공은 교황 비오 9라고 한다.

말구유의 나무 조각이 들어가 있는 수정 보관함
교황 비오9세 조각상

이 성당에서 특이했던 점은 성당 벽 쪽에 잔뜩 나열해 있던 작은 벽종시계 보관함처럼 보이는 것들었다.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음)

그런데 자세히 보니 웬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조금 시간이 흐르자 문이 열리고 신부님이 나오셨다. (찾아가는 교리 상담소?) 아마도 고해성사 하는 곳이 아닐까 싶었다.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성당 내부

대성전 구경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다시 테르미니역으로 향했다. 이쯤해서 테르미니역에 대해 잠시 설명해볼까. 이곳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는 물론 프랑스 파리, 독일 뮌헨, 스위스 제네바 등 유럽의 주요 도시로도 갈 수 있는 국제편 기차까지 운영되는 로마의 중앙 of 중앙역이다.

이 역 부근에는 여행기 6에서 소개한 카라칼라 욕장보다 크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형 목욕탕이 있다. 대형 목욕탕thermae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어 테르미니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를 타기 전에 시간이 잠시 비어서 무작정 테르미니역 구경을 시작했다. (수하물 보관소에서 짐을 찾고 난 뒤) 돌아다니다 서점을 발견했는데, 이곳에서 어제 찾다가 포기한 원피스를 발견했다.

테르미니역 서점

그렇게 정처 없이 테르미니역을 헤매다 하나의 유물과 마주쳤다. 바로 역 지하의 맥도날드에 있던 세르비우스 성벽이다. 아마 전 세계에서, 맥도날드 안에서 유물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은 로마가 유일하지 않을까?

맥도날드 안의 세르비우스 성벽
맥도날드 안의 세르비우스 성벽

세르비우스 성벽은 테르미니역 앞 광장에도 있다. 얼핏 보면 그냥 검누런 돌무더기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세르비우스 성벽이다. 이 성벽은 로마의 왕 타르퀴니우스가 암살된 뒤에 왕위에 오른 6대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도시의 외적 방어를 위해 건설한 것이다.

테르미니역 밖의 세르비우스 성벽
테르미니역 밖의 세르비우스 성벽

기차를 타고 공항으로 돌아오는 시간 동안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본 유물을 떠올리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성벽으로 그 유명한 한니발의 침공도 막아냈다곤 하지만, 세르비우스 성벽은 내가 본 로마 제국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유물이다.

로마는 문을 열어젖혔기에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나라다. 포로로마노와 팔란티노 언덕의 시민들은 이 세상의 누구든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로만 드림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렇기에 가난으로 헤매던 부랑자, 돌아갈 곳이 없는 범죄자, 산적, 거렁뱅이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겠다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로마는 왜 도로를 만들었을까. 길이란 세계로 뻗어나갈 야망을 뜻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 의해 침략당하기 손쉬운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위험을 무릅썼기에 로마는 기꺼이 제국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박해하던 기독교마저 품어 안으며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세계를 지배할 보편종교를 만들었던 제국, 로마는 길이 끝났던 곳에서 새로운 길이 되었다.

그렇기에 로마와 성벽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나와 우리를 지키겠다고 외부에서 온 타인과 나를 구별 짓는 장벽을 도심 안에 가득 세웠을 때, 당장의 위험은 방어할 수 있어도 제국으로 진화할 로마의 존재 이유는 부정당한 건 아닐지. 그래서 역사가 타키투스는 위대한 제국은 소심함으로 유지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비행기 타러 공항으로 가는 길

공항으로 향하며 이번 로마 여행의 결론을 내려본다. 내가 로마에서 본 것은 단지 서양 문화의 로망이자 천년 제국의 수도로서의 위엄, 천년 종교의 중심지에서 배출한 걸작들이 아니었다.

만신전으로 태어나 성당으로 거듭난 판테온의 운명,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포로로마노의 위대한 포부, 콜로세움과 카라칼라 욕장의 돌들에서 뿜어져 나온 제국으로서의 자부심, 캄피돌리오에 담긴 반전 같은 희망, 신이 인간을 얼마나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알려준 바티칸과 수많은 성당, 제국마저 정복해 낸 카푸친 수도회와 카타콤의 집념까지.

지금의 나를 내려놓고, 마음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로마의 숨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로마에서 보이는 것들이다. 같은 시공간에 있지 않았던 완벽한 타인들을 통해 얻는 진정한 위로, 그것의 실체는 나 또한 언제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렇기에 2,000년이 지났어도 로마는 여전히 로망이다. ‘로마 와서 꼭 봐야 하는것들을 보느라 지친 나를 달래다 보면 어느새 다른 것이 보이는 도시, 로마는 내가 가고 싶었던 로망의 시대로 나를 이동시켜 주는 시간 여행지였다.

그래서 나는 로마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로마에서 먹었던 마지막 음식. 맛은 그냥 그랬지만 맛으로 먹나. 낭만으로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