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글 /이탈리아 여행기

2024 로마 여행기⑧ 보르게세, 넌 감동이었어

919일 로마 6일차, 오늘은 투어도 빡빡한 일정도 없는 말 그대로 쉬어가는 날이다. 어제 저녁에 레스토랑에서 혼자 와인 1L를 마시고 숙소로 와서 미리 사 뒀던 와인까지 까먹는 바람에 좀 늦게 잠에서 깼다. (이 정도 양이면 나에겐 치사량이다.)

1L 와인 먹고와서 숙소에서 이걸 또 먹고 잤다. 저 와인은 순전히 이름 때문에 사본 와인인데 맛있는 줄은 잘 모르겠다.
이 정도 주량이었으면 문제 없었을 텐데 ..

숙취를 달래고 천천히 집에서 나왔다. 오늘의 목표지는 딱 한 곳, 보르게세 미술관이다. 원래 로마 온 바로 다음 날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이곳은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 불가. 그래서 보르게세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17유로(입장료 15유로+예약 수수료 2유로)를 주고 919일 오후 1~3시 입장권을 예매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두 시간 단위로 입장을 제한한다 .

보르게세 미술관으로 가려고 아침에 사통팔달 로마의 길이 통하는 포폴로광장으로 향했다

테베레 강을 건너 포폴로광장으로 가는 길

하수구 뚜껑으로 마주친 김에 S.P.Q.R이라는 정체불명의 문구에 대해 설명해야겠다. SPQR은 라틴어 문장 'Senatus Populus que Romanus', '로마 원로원과 대중'을 뜻하는 약자다.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갔음을 뜻하는 로마의 상징과도 같은 표현이다. 로마를 거닐다보면 이 S.P.Q.R이라는 문구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캄피돌리오 광장에도 S.P.Q.R
박물관에도 S.P.Q.R
길 가다가도...

테베레 강을 지나와 포폴로 광장 인근의 한 카페에서 오늘도 카푸치노와 코르넷또로 아침을 시작(숙취를 해소)했다. 매일 아침을 함께 했더니 이제 이 세트를 안 먹으면 잠이 안 깨는 것 같다.

카푸치노와 코르넷또. 합쳐서  2.5 유로
로마 와서 카프카 읽기

카프카 시집도 다 읽고 나니 다시 심심해져서 포폴로광장 쪽으로 (아무 대책 없이) 걸어나왔다. 그런데 마침 포폴로광장에선 바자회 비스무레한 게 열리고 있었다. 중고책을 쌓아놓고 팔고 있길래 이탈리아어 문맹임에도 책 구경을 했다.

그러다 4유로를 주고 기념삼아 어린왕자를 하나 구매했다. 한국인이 이탈리아 와서 중고 프랑스 책 구입

네가 오후 1시에 보르게세를 예약해뒀다면 나는 12시부터 행복해질거야

책 구경을 마치고 다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옆에서 이번엔 옷 바자회 현장을 발견했다. 중고 옷을 잔뜩 쌓아놓고 팔았는데 이탈리아인들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옷을 고르고 있었다. 뭐지? 동묘인가?

도매상인줄 알고 비싸게 받을까봐 허름하게 입고 갔다.

바티칸에서 가디건을 잃어버린 탓에 제법 쌀쌀했기에 나도 이탈리아인 틈 사이에 껴서 쓸만한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디건 하나를 발견했는데 너무 진보적인 빨간색이라 잠시 둘러보다 올게요’를 시전한 사이 어떤 아주머니가 내 가디건을 낚아채 가버렸다.

내 가디건 내놔...

상심한 채 다시 하염없이 옷을 뒤지다 포기할 때쯤 회색 가을용 잠바를 하나 발견했다. 생각보다 두꺼워서 좀 더울까 싶었지만 이번엔 빼앗길 수 없었기에 5유로 주고 바로 구매했다.

9월 말까지 더웠던 서울과 달리 로마는 아침 저녁으론 날씨가 추워서 이 옷 안 샀으면 감기 걸릴 뻔했다.

이탈리안 동묘에서 옷 구경 홀릭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인 10시반이 되었다.(웨이팅하고 그러면 11시 넘을 거잖아.) 오늘 점심은 포폴로광장 인근의 로마식 피자였다.

미리 지도에서 찍어놓은 Pizza Rustica라는 테이크아웃 피자집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조각 피자 두 개를 골랐다. 흔히 이탈리아 피자하면 나폴리피자가 유명한데, 로마식 피자는 사진에 보이는 대로 사각형으로 잘라주는 것이 특징이다.

바질이나 루꼴라 토핑으로 대표되는 건강한 느낌적 느낌의 이탈리아식 피자와 달리 로마식 피자에는 토핑을 이것저것 많이 올려서 관광객들에겐 더 익숙한 맛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먹은 것들은 그랬다.)

비둘기들이 눈치채기 전에 얼른 먹었다.

피자를 씹어먹고 11시반쯤 보르게세 미술관으로 향했다. 1시부터 입장 시작인데 이렇게 서두른 이유는 보르게세 미술관이 로마 시민들의 쉼터이자 대표적인 피크닉 장소 보르게세 공원안에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가기 전 공원을 좀 즐기기 위해서.

보르게세 공원을 지나 미술관 쪽으로 가는 길
보르게세 공원을 거쳐 미술관 가는 길에 보이는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을 향해 걷다보면 보르게세 공원의 숨은 절경이라 할 수 있는 Temple of Aesculapius(아스클레피오스 신전) 호수가 나온다. 로마에 와서 본 경관 중에 가히 최고였다. 살어리 살어리 랏다 로마애 살어리 랏다 피자랑 와인이랑 먹고 로마애 살어리랏다.. 

처음엔 웬 호수에서 보트인가 싶었는데..
키야 이게 신선놀음이지...
행복해보이는 새들
압구정을 만든 한명회도 여기 왔으면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이처럼 로마에 왔지만 로마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보르게세 공원에 오면 된다.

로마 속의 다른 로마, 보르게세 공원 속 시에나 광장을 지나..
분수대도 지나...
보르게세 미술관

공원을 가로 질러 보르게세 미술관에 도착했다. 30분 전까지는 꼭 오라고 해서 일찌감치 길을 나섰는데, 경치가 너무 예뻐서 구경하느라 허겁지겁 딱 맞춰서 도착했다.

보르게세는 로마에서 바티칸 다음으로 소장품이 많은 미술관이다. 그 명성과 위치, 또 다른 유적지나 관광지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보르게세 미술관야말로 로마 최고의 '저평가 우량주'라고 장담할 수 있다.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그렇지 않더라도) 꼭 와보길 강추한다.

가장 큰 강점은 2시간 단위로 입장객을 제한하고 있어서 바티칸이나 관광객들이 많은 미술관, 박물관과 달리 매우 쾌적한 환경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르게세 미술관에 수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양대산맥은 누가 뭐래도 베르니니와 카라바조이다. 먼저 베르니니에 대해 말하자면, 이곳 보르게세 미술관에선 그리스 로마 신화 마니아들이라면 눈 돌아갈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저승의 신 하데스가 아내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을 묘사한 페르세포네의 납치, 아폴론이 사랑한 숲의 님프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하는 장면을 묘사한 아폴론과 다프네가 대표작이다.

베르니니, <페르세포네의 납치>
페르세포네의 납치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아폴론과 다프네. 언제나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곳이다.

천장 벽화에서부터 조각으로 이어지는 '아폴론과 다프네'

바티칸도 그렇고 보르게세도 그렇고 여백의 미 같은 건 없다! 천장도 어떤 공간도 가득 채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Let's 조각 타임

젠장 또 스핑크스야, 이러면 난 또 이집트를 숭배할 수밖에 없잖아
Fighting satyr
헤라클레스의 활약을 묘사한 조각으로 기억한다.
Leda with cupid
베르니니의 작품 다윗
베르니니의 작품 <아이네아스>
승리의 비너스

조각  타임이 끝났으면 이제 회화 타임이다. 보르게세 미술관 회화 파트의 핵심은 이탈리아의 광인 화가 카라바조다. 카라바조는 마치 NBA의 사고뭉치 천재 농구선수처럼, 뛰어난 재능충인 동시에 심각한 문제아였다.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키다 결국 사람까지 죽이는 범죄를 저질러 로마를 떠나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의 망명 생활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카라바조의 대표작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카라바조는 교황에게 용서를 빌고자 위에 첨부한 작품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을 그렸다. 카라바조는 사람 목 따는 광경을 묘사하는 데 환장한 변태적인 전문가인데(그냥 미친놈이다.), 위 작품 속 골리앗의 얼굴이 바로 카라바조 본인이다. 골리앗의 목을 들고 있는 다윗은 젊었을 적 카라바조의 얼굴인데, 일종의 이중(二重) 초상화인 셈이다.

카라바조는 교황 바오로 5세에게 특별사면을 받으러 반성하는 의미로(죄 지은 카라바조는 이미 제가 죽였다 치고 용서해주세요) 이 그림을 그렸지만 교황에 전달되지 못했다고 한다.(교황 : 되겠냐??)

카라바조 <글을 쓰는 성 히에로니무스>
카라바조 <병든 바쿠스>
카라바조 <성모와 허드렛일 하는 사람>
카라바조 <세례 요한>

베르니니부터 카라바조까지, 여유롭게 감상하고 나니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났다. 시간이 되자 매정하게도 나가라고 방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보르게세미술관 바닥의 모자이크 장식

보르게세 미술관을 나와 다 즐기지 못한 보르게세 공원으로 향했다. 

보르게세 미술관 밖의 벤치. 보르게세 입장할 때 붙여주는 스티커가 가득 붙어 있다.
보르게세 공원 안 The Temple of Diana Rome
분수대
시에나 광장 쪽으로 되돌아가는 길

돌아다니다보니 목이 말라서 공원 안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 경치가 너무 좋아서(라는 핑계로) 10유로를 주고 식전주 아페롤 스프리츠를 하나 시켰다. 식전주를 주문하자 같이 먹으라고 안주를 갔다줬다. 이탈리아에선 식전주만 시켜도 안주를 제공하는 문화가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었나부다.

맛은 그냥저냥 그랬지만 맛으로 먹나, 낭만으로 먹지.
보르게세 공원 속 작은 놀이공원
신나서 그네 타고 놀다가 이탈리아 꼬맹이들이 쳐다보고 있어서 얼른 자리를 비켜줬다.

보르게세 공원에서 남쪽으로 쭉 걸어내려가면 로마의 유명한 전망 명소라는 '핀초 언덕'이 나온다. 그래서 멋진 전망을 즐기러 다시 하염없이 걸었다. (다시 말하지만 로마는 걷기 좋은 도시 < 걸을 수밖에 없는 도시다.)

전망은 진짜 죽인다.
핀초언덕으로 내려가는 길
젠장 또 오벨리스크야, 이러면 난 또 이집트를 숭배할 수밖에 없잖아 (핀초언덕 앞)
핀초언덕으로 내려가는 길에 발견한 메디치빌라 입구. 들어가보진 않았다.
핀초언덕 쪽에서 내려가면 보이는 포폴로광장 전망

그렇게 핀초언덕 전망을 보고 아래로 쭉 내려가는 데 왠지 와본 장소 같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뭐지? 꿈에서 봤나?) 뭔가 싶어 멈춰서 한참 아래를 바라보다가 이곳이 내가 첫날 왔던 스페인 광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혼자 아~~~여기가 거기구나~~감탄하면서.(주위에 한국인이 없었길 바란다.)

핀초언덕에서 내려가면 스페인 광장이다.

역시 로마란 이런 곳이다. 길을 잃어도 잃어도 다시 새로운 길과 마주하는.(길치 합리화도 가지가지)

스페인 계단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첫 날 스페인 광장에서 못 먹은 티라미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스페인 광장으로 내려가 마침내 로마에서 제일 유명한 티라미수집 폼피에 도착했다. 역시 로마란 길을 잃어도 새로운 길과 마주하는 곳. (티라미수 쳐먹는 핑계도 가지가지)

클래식이랑 딸기가 가장 많던데 가장 무난해보이는 클래식으로 먹었다.
티라미수란 이탈리아어로 '나를 끌어올리다'라는 뜻. 6일차 여행에 지쳤으니 끌어올릴 때가 됐지.

오늘은 보르게세 공원에서, 베르니니와 카라바조로, 다시 도착한 스페인 광장의 티라미수를 흡입하며 며칠 간 유적지 돌아다니느라 조금 지쳤던 몸과 마음을 회복한 날. 원기 회복했으니 내일은 다시 유적지 보러 간다.

로마 카타콤베 투어와 로마에서의 마지막 밤은 다음 편에서!

숙소에 돌아와 토스카나 와인을 하나 뜯었는데 실수로 코르크를 안에 빠뜨렸다.그래서 맛있었나?

다음 편 : <제국마저 정복한 진짜 광기>